[CEO를 위한 미술산책] 캔버스에 물감 흩뿌리기…화가의 즉흥감정 행위로 표현
입력
- 2013-10-11 21:51:29
- 수정
- 2013-10-11 21:51:29
- 2013-10-12 A19면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16) 액션페인팅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1951년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잭슨 폴록(1912~1956)이라는 화가가 관객 앞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들이붓고(dripping) 있다고 해야 맞다. 그는 두 손으로 페인트 통을 들고 마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광기 어린 모습으로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 페인트 통이 비기가 무섭게 그는 또 하나의 페인트 통을 들고 종전의 행위를 반복한다.
붓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간간이 막대기에 페인트를 묻혀 캔버스 위에 뿌렸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화가들이 캔버스를 세워놓고 작업하는 것과는 다르게 바닥에 펼쳐놓거나 아예 그 위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작가는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만들어나간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고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유럽의 추상미술은 종전의 회화전통을 파괴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색채구사와 구성감각은 남겨뒀다. 그래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작품은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화가가 미술품을 만들겠다는 의도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폴록의 작품은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깡그리 전복시켰다. 그에게 그림은 미리 어떤 의도를 갖고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에서 솟아나는 순간적인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화가가 자신의 즉흥적인 감정과 몸동작을 물감을 통해서 표현하는 미술을 ‘추상표현주의’ 혹은 몸동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액션페인팅’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다이스트나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주 시도한 자동기술법(automatisme), 즉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방식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다. 폴록에 의해 화려하게 꽃을 피운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이 세계미술의 무대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극한 사조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주도자로 떠오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에 일반 대중을 겨냥한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한편 막다른 골목에 처한 예술가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연방정부 아트 프로젝트(Federal Art Project)’를 조직해 수입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매주 23달러86센트를 생활 보조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작가는 그 대가로 두 달에 한 점씩 자신이 제작한 작품을 재무부에 제출하면 됐다. 연방정부는 이렇게 해서 거둬들인 20만여점의 예술품을 지역의 학교, 도서관, 병원에 무상 기증했다. 오늘날 미국 지역사회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예술 인프라는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구축된 것이다. 한 지도자의 혜안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FAP 보조금을 받은 작가 중에는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폴록, 아실 고키 등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자칫 막노동자로 전락할 뻔했던 작가들은 보조금 덕택에 어려운 시절을 넘길 수 있었다.
미국미술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유럽의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미국으로 잇달아 망명했기 때문이다. 망명 작가들은 종전 이후에도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아 뉴욕이 세계 미술의 새로운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런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결국 화를 부르고 만다. 그는 마흔넷의 한창 나이에 음주운전을 하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생의 최후 순간까지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액션페인터다운 최후였다.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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