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주체적 삶을 산 여류화가의 자유로운 예술혼
관련이슈 : 명화 속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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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 빈민촌이자 환락가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빈곤하고 젊은 예술혼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던 몽마르트르 언덕. 후기 인상파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걸출한 화가들의 발길과 손길이 닿았던 그곳에 당시 한 여인이 있었다. 때론 모델로, 때론 친구로, 때론 애인으로, 그리고 스스로 화가로도 활동했던 19세기 ‘몽마르트르 언덕의 뮤즈’, 수잔 발라동이다.
가난 속에 사생아로 태어났던 발라동은 다섯 살 때부터 파리에 살면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화가들의 눈에 띄어 직업 모델의 길에 접어들었다. 18세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다른 화가들 사이의 스캔들은 잠잠해질 줄 몰랐다.
그렇기에 르누아르, 로트레크, 드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당대의 화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각 화가의 개성과 화법에 따라 고상한 아름다움을 가진 아낙네의 모습이 되었다가,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는 막장인생으로 비쳐지는 등 팔색조 매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내면에 감춰진 예술적 재능을 품은 가공되지 않은 보석이었다는 점이다. 화가의 어깨너머로 배운 그녀의 데생에서 그림쟁이의 자질을 발견한 것은 로트레크, 이를 체계적으로 키워 준 것은 드가였다.
여류화가로서 수잔 발라동은 누드에 열중했다. 다만, 남성 화가들이 여성 누드를 바라볼 때의 탐미적인 관점과는 달리, 여성의 몸속에 녹아 있는 삶과 고뇌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결국 그림 속에서 나와 그림을 그리는 주체로서, 자신을 그리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한때 은행가를 만나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누리려 했던 발라동은 마지막 연인을 만난다. 바로 아들 위트릴로의 친구이자 20년 연하의 우터.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된 발라동은 문제작 ‘아담과 이브’를 완성하고 그와 결혼하였다.
발라동의 삶이 그랬듯, 작품 ‘아담과 이브’도 당시 매우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발표할 당시엔 아담 역시 전라의 상태였으나 추후 무화과잎을 그려 넣었다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브가 웃는 얼굴로 금지된 열매를 따려는 순간, 아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 이브를 말리려는 것인지, 사과 따는 것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브의 유혹에 굴복당하면서도 창조주에게 항변할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것은 아닐지. 남성이라면 생각하기 힘든 재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품의 계속된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터와 헤어지고 아들 역시 결혼으로 그녀 곁을 떠나자 곧 병을 얻은 발라동은 피카소, 발자크 등의 조문을 받으며 그녀가 사랑했던 몽마르트르에 묻히게 되었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당시 몽마르트르를 들뜨게 했던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이 여전히 수많은 화가의 작품 속에서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 기사입력 2009.05.28 (목)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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