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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소멸 100년… 궁궐은 어디로건축학교수 8명 ‘궁궐의 눈물, 백년의

눌재 2009. 11. 4. 00:05
대한제국소멸 100년… 궁궐은 어디로
건축학교수 8명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펴내
일제에 의해 훼절된 아픔의 역사 파헤쳐
  •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황권 국가인 대한제국의 자존심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전통이 숨 쉬는 한양, 서울을 상징하는 공간은 많다. 궁궐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소다. 서울을 상징하고 드러내는 궁궐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신음했다. 궁궐은 쉽게 헐렸고, 새로운 자리에는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궁궐과 우리 역사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여러 궁궐을 살펴볼 필요도 없다. 경복궁만 살펴봐도 그렇다.

    조선이 이름을 달리하기 전인 19세기 말 경복궁의 건물 수는 509개 동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광복 후에 남은 건물은 40개 동뿐이었다. 일제 강점이 국권 상실은 물론 우리 역사의 심장과도 같은 궁궐에 심대한 타격을 가한 것이다.

    대한제국을 열었던 고종을 비롯한 조정이 궁궐 훼손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선을 짧게 대체한 대한제국은 원구단을 건설하는 등 궁궐 건축을 통해 황권 강화에 적극 나섰다. 황제의 나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표출했으며, 근대국가 진입을 적극 꾀했다.

    조선 궁궐의 번성과 훼절의 역사에 주목한 신간이 나왔다. 전문가들이 모여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효형출판)을 내놓은 것.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와 조재모 경북대 건축학부 교수 등 전문가 8명이 나섰다. 공저자들은 서울의 궁궐은 물론 평양의 궁궐까지 일부 다루며 건립과 훼절의 역사를 파헤쳤다.

    안 교수의 ‘고종삼천지교’가 눈길을 끈다. 조선이 마지막을 향해 가던 고종 시절 한양에는 궁궐 수리와 건립을 위한 여러 노력이 펼쳐졌다. 경복궁 중건과 경운궁 건립 및 중건이 모두 공역으로 이뤄졌다. 경운궁 건설로 고종은 황제국가로서 자존심을 드러냈다. 조선의 정궁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바꾼 과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운궁의 건설은 한양의 도시 중심을 바꾸었고, 도로망을 재편했다. 도시 구조 개편은 근대국가를 향한 출발이기도 했다.

    순종이 즉위한 뒤, 창덕궁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위상도 변했다. 창덕궁이 황궁이 되고,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인식된 것이다.

    공저자들은 ‘제국의 소멸 100년, 우리 궁궐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주제 의식을 고민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국권 상실 과정에서 궁궐은 일제에 거추장스런 존재가 됐다. 일제의 의중에 따라 조선의 궁궐들이 수난을 겪게 된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임금 침소인 회상전만 하더라도 남산의 일본계 사찰인 조계사로 팔려나갔다. 그곳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장소로 사용됐다. 창경궁은 벚나무로 꾸며진 종합 위락시설로 위상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평양의 풍경궁은 일제의 군사기지로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본계 사찰에 팔린 궁궐 정문도 여럿이었다. 평양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 궁궐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들어선다. 경복궁만 하더라도 일제 식민지 경영의 선전장이 들어섰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일제의 국력 과시용과 선전용으로 전락한 것이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 기사입력 2009.11.03 (화)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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