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꼬 | ||
날로 초식 동물화 되어 가는 과정에 반발하며 “갈치 한 동가리도 없나.”하고 물으면 “야 이 노므 자슥아, 돈이 있어야 갈치를 사제.”라는 즉각적인 반격이 돌아온다. 나는 안다. 물정 모르는 반찬투정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걸. 그러나 초여름부터 한없이 긴 푸른 풀밭만을 묵묵히 걸어 왔으니 식탁 앞에서의 항의는 어쩌면 나 자신에게 던지는 위안인지도 모른다. ##밥상엔 텃밭에서 따온 것들뿐 시골의 여름 밥상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밥은 꽁보리밥에 ‘해무꼬’는 호박 가지 고추 오이 등 텃밭에서 따온 것을 무치거나 볶아 낸 것들이지만 그린 필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해무꼬’들은 신선도가 곧 맛인데 아침에 먹던 것을 점심 때 꺼내 먹으면 풀이 죽어 맛이 없다. 이웃 부잣집에서는 멸치 김 미역 등 건어물은 물론 조기 갈치 고등어를 미리미리 마련해 뒀다가 더위에 지친 입맛 옆에 쓰러져 누워있는 식욕을 곧추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우리 집 사정은 달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들일을 보러 가시고 집은 비어 있다. 배는 고프지만 마땅한 ‘해무꼬’가 없다. 감나무 가지에 걸어둔 보리밥 소쿠리를 내리면 달아나는 건 파리 떼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은 풀 새우 똥이다. 시커먼 꽁당 보리밥 위에서 새카만 것들이 모여 검은 축제의 블루스 판을 벌이고 있었나 보다. 우물에서 퍼온 찬물에 보리밥을 씻어 아침에 먹다 남은 끓인 된장 한 숟갈을 입안에 떠 넣으면 ‘울고 싶다’는 생각이 쉽게 현실로 바뀌어 버린다. 눈물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진다. 젠장! 하고 소리치자 다시 한 방울 뚝! 동쪽 담 밑 그늘에 펴둔 살평상에서 아침밥을 먹을 땐 더욱 기가 찬다. ‘해무꼬’도 문제려니와 금세 담을 넘어온 아침 해가 목 줄기에 난 땀띠를 들쑤셔 놓아 신경질을 한계 수치까지 돋우어 놓는다. 씩씩거리다 말고 머리에 찬물 한 바가지 덮어쓰기 위해 우물가로 뛰쳐나가면 항상 윽박지르기로 나를 제압해온 어머니도 이 때만은 한풀 꺾여 “오냐, 오는 장날은 간갈치라도 사 올께 밥이나 마저 묵어라”하신다. 어머니의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빗자루 뜸질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얼른 밥에 찬물을 부어 보리밥을 목구멍으로 떠내려 보내야 한다. 유년의 여름을 추억해 보면 아침도, 점심도 보리밥을 찬물에 띄워 노 없이 떠내려 보낸 기억밖에 없다. 그나마 우물의 찬물이 없었다면 시골 소년 하나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 손에 소금 절인 간갈치가… 고향 장은 오일장이다. 오는 장날은 간 갈치가 약속된 날이다.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어머니는 피했으면 싶었을 게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오른손엔 소금에 절인 간갈치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갈치는 너무 짜 한 조각 입에 물 때마다 겨울날 소변을 보고 나서 떨듯 온몸을 떨어야 했지만 풀밭 신세를 면한다는 그 일념 하나 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땐 그렇게 싫었던 꽁보리밥이 먹고 싶다. 찬물을 와인처럼 마시며 검은 축제의 블루스를 추고 싶다. 안주는 로크포르 치즈(Roquefort cheese`푸른곰팡이로 숙성시켜 줄무늬가 들어 있는 프랑스산 양젖 치즈) 대신에 짜고 타박한 간갈치를 베어 먹으며 땀띠가 톡톡 쏘아대던 그 목 언저리를 다시 한 번 쥐어뜯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 ||
작성일: 2009년 10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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