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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每日 한글백일장 당선작] 산문 고등부 장원 '엄마의 강'

눌재 2009. 11. 20. 21:58

[22회 每日 한글백일장 당선작] 산문 고등부 장원 '엄마의 강'
 
 
올해 처음으로 경상북도교육청과 함께 실시한 제22회 매일한글백일장 공모전에는 모두 1천924점의 수준높은 작품들이 응모해 모두 89편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운문과 산문으로 나눠 실시된 이번 백일장에서는 신설된 초등부를 비롯해, 중등부와 고등부 및 일반부에서 실력을 겨뤄 전체 대상(1명)과 각 부문별 장원(1명), 차상(1명), 차하(2명), 장려상(3명)이 선정됐습니다.

엄마의 강

장윤형(경주여자정보고 3학년)

꼭 내 마음속을 비추는 것 같다. 물살이 바람에 쓸려 ‘쏴아’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분명 표정없이 내려다본 강이었는데, 물결이 구겨져 인상을 한가득 쓴 얼굴이 비쳐졌다. 심술이 가득한 어린 나의 얼굴을 담고 있는 강은 나를 달래듯 다시 수면이 잠잠해진다. 강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 굴뚝에서는 뭉게뭉게 엄마의 땀에 젖은 얼굴이 피어오른다. 강은 잔잔하고 조용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끼고 있던 강은 상류여서, 강의 폭도 좁고 경사가 급했다. 폭포가 위에서 떨어지던 그곳의 강은 위험했다. 물살이 급해서 물고기도 잡기 힘들었고, 주변엔 뾰족하고 모난 돌뿐이어서 자주 다치기도 했다. 물의 양은 적은데, 그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빠른 물의 속도에 의해 일어난 침식작용은 내가 놀기에 더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어쩌다가 한번 가면 다쳐서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엄마에게 혼만 났다. 하지만 이사 온 이곳의 강은 다르다. 중하류의 강이라, 모난 돌도 급한 물살도 없다.

잔잔한 강. 꼭 잠든 바다처럼 이곳은 따뜻하고 좋다. 사납게 움직이던 물고기도 없고 여유롭게 헤엄치는 아기 물고기들이 사는 곳. 이곳에 오기까지 엄마에겐 모든 것이 험난했다. 엄마와 아빠는 늘 돈 문제로 다툼이 많으셨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던 우리 집은 학교 급식비도 제때 못 낼 만큼 가난했다. 엄마는 아빠 몰래 돈을 항상 내 손에 쥐여 주셨다. 급식비의 절반값이다. 학교가 보이면 바로 교무실로 달려가 선생님께 돈을 내민다. 사정을 잘 알던 담임선생님은 그 돈을 지갑에 챙겨 넣고, 여유가 생기면 나머지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벌써 급식비 세 달치가 밀렸지만 선생님은 천천히 가져오라고 하셨다. 연봉도 월급도 심지어 주급도 아닌 시급을 받는 아빠. 매일 직장도 직업도 바뀌던 아빠. 원래 아빠는 저렇지 않았는데…….

아빠가 다니던 과자 공장은 소규모의 수공업 공장이었다. 아빠가 맡은 일은 과자의 모양을 똑같이 찍어내는 것인데, 모양이 종종 다르게 나오면 아빠는 그것을 모아서 나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아빠의 ‘구겨진 모양’의 과자는 나에게 최고의 간식이었다.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면 집안에는 과자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던 아빠의 구겨진 과자를 볼 수 없었던 것은 작년 초부터였다. 무자비로 과자를 생산하던 공장의 사장이 골프장을 개발 중,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고 공장이 부도난 그 시기쯤 아빠의 술주정이 시작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았고, 같은 처지에 놓인 아저씨들도 많았지만 유독 우리 아빠의 표정은 더 어두웠다. 맡은 임무도 제일 많았던 만큼 사장과 친분도 있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몸값이 더 싸다는 이유로 아빠를 버렸다. 믿었던 사장에게 당한 배신감에 밀린 월급이 서러움을 더 보탰기 때문이다.

아빠는 사장의 회사가 어렵다는 거짓말에만 벌써 네 번이나 속아, 네 달어치 월급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자까지 쳐서 단단히 돌려주겠다던 사장은 결국 우리 집에 빚만 가득 쌓아놓고 모습을 감췄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자까지 쳐주겠다며 빌려온 돈들이 모여서 결국에는 커다란 눈덩이 같은 빚을 만들어 내버렸다.

엄마가 자주 보던 드라마에 나오는 빚쟁이들이 쳐들어오는 상황까진 아니어도, 거의 그럴 지경까지 다다른 것이다. 엄마도 나도 그 누구도 아빠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엄마는 아빠가 안쓰러워 모른 척 살림을 잘 꾸려나갔지만 문제는 아빠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아빠는 처음 공장이 망하고, 엄마에게 연방 미안하다고 말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며 눈물을 보였다. 엄마는 괜찮다고 아빠를 위로했지만, 아빠는 엄마의 용서보다는 스스로의 분노에 못 이겨 결국 술에 의지하더니,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버렸다. 결국은 어느 한 가정이 파탄 나는 과정을 우리 집이 그대로 밟아온 꼴이 되었다. 노을이 푸른빛을 돌며 산 너머로 드러눕는다. 엄마는 바가지 하나를 들고 목장갑을 끼더니 물살이 더 세진 강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기어다니며 물속을 살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나고 지루한 내가 하품을 하자, 엄마가 물에서 나왔다. 나는 엄마의 손에 들린 바가지 안을 들여다봤다. 소라같이 생겼지만 작고 검은 것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다슬기다. 매끌매끌하게 아직 물에 젖은 다슬기들이 서로 엉켜 몸을 비빈다. 내일 장에 가져다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하니,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기 구석에서 다슬기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엄마는 저녁밥을 차리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 몰래 다슬기를 조금 가까이서 쳐다보고 있을 때쯤, 얼큰하게 취한 아빠가 방으로 들이닥쳤다. 들어오자마자 아빠는 소리를 꽥 지르며 술병을 흔들었고, 놀란 내가 엄마를 찾아 부엌으로 뛰어갔다. 아빠는 이미 다슬기를 온 방에 다 뿌리며 밟았고, 그 위로 술병을 던져 껍데기가 다 깨진 다슬기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빠에게선 더 이상 달콤한 과자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의 고함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썼다. 아빠의 시비를 모른 척하고, 아빠의 손찌검을 견뎌내며 집안에 물건을 챙겨 내 손을 잡고 나왔다.

그리고 달이 청명하게 비추는 그 강을 향해 뛰었다. 물살이 거침없이 바위를 가르고 지나간다. 온통 뾰족한 돌들도 둘러싸인, 디딜 곳도 안전한 곳도 없는 그 강. 꼭 아빠 같은 그 강을 엄마와 나는 도망치듯 건너 나왔다. 건너온 강에 주저앉은 엄마는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면서 서럽게 엉엉 울었다. 내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듯 부르면서…….

“은석아… 은석아… 은석아….”

“은석아! 밥 먹어라!”

뒷문으로 나온 엄마가 크게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른다. 나는 바위를 밟고 일어서서 깡충깡충 뛰며 손으로 대답을 했다. 첨벙첨벙 얕고 잔잔한 강을 건넌다. 햇살을 받고 따뜻해진 강이 나를 안아준다. 엄마처럼. 둥글고 작은 돌들이 발에 밟힌다. 맨발로 건너 온 발가락 사이로 작은 다슬기 하나가 끼여 올라왔다. 나는 다슬기를 빼들고 뭍으로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고운 모래도 밟을 수 있다. 아마 내가 싫어하던 그 거세고 무서운 상류 강에서 치이고 깎이며 온갖 아픔을 겪고 여기까지 와서 곱게 갈렸을 것이다. 모난 돌들이 퇴적된 저 모래는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아빠의 조각일지도 모를 저 모래들. 고운 모래를 한 번 밟았다가 다시 발을 뗐다. 그리고 다시 따뜻한 강물에 발을 헹궜다. 모래를 피해서 둥근 돌들을 밟고 올라갔다. 봄바람과 봄 향기가 내 강을 예쁘게 다듬고 있다. 나는 엄마의 품으로 달렸다. 다슬기 하나를 손에 꼭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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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