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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의 여유…여지없이 엷은 감성을 돋운다 …해우소에서 통곡하려면
눈물이 자주 고이는 계절이다. 그러다 주르르 곡절없이, 속절없이 흐르기도 한다. 그래서 선암사로 갔다. 응당 떠오르는 시인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 전문)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그 때가 벌써 한 달 하고도 며칠 전이었으니 이미 계절은 많이 바뀌어 버렸다. 하나 그 때나 지금이나 해우소는 다를 바가 없다. 단풍마저 지고. 그 잎사귀들이 해우소 앞에서 얼쩡거리다 어느 바람에 휘 멀어졌으리. 마치 취해 춤추듯. 누군들 괜히 울고 싶을까. 정말 해우소에 앉아 실컷 운 사람들이 있을까. 낙엽은 뒹굴고. 그래서 어떤 이가 "말하며 취한다. 취하며 춤춘다"고 했을까. 그 선암사 뒷간, 해묵은 400년의 해우소를 다시 그리워하며. 그래도 눈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이 눈물은 어떤가. 테니슨의 '눈물, 덧없는 눈물'. "눈물 덧 없이 영문을 모르게 흐르는 눈물/ 어느 거룩하고 깊은 절망에서 비롯한 눈물이기에/ 가슴에 솟아올라 눈에 고인다/ 다행스런 가을 벌판을 바라볼 때면/ 되살아오는 영영 사라진 세월이여.// 생생하기는/ 바다 너머 저 쪽 세상에서 벗들을 태워 오는/ 돛대위에 반짝이는 첫 햇살 같고,/ 슬프긴 마치/ 바다 너머 그 밑으로/ 사랑하는 모든 이를 태우고 가라앉는/ 그 돛을 붉으레 물들이는 마지막 햇살 같고/ 그리도 슬프고 그리도 생생한 영영 사라진 세월이여."('눈물, 덧없는 눈물' 부분) 일주문을 저만큼 두고 승선교는 아름다운 곡선 아치가 여유롭다. 품위 있는 자태. 굵은 돌이 늠름하게 아래를 받쳐 빼곡히 들어 찬 자잔한 잔돌마저 여간 예쁘지가 않다. 그들이 함께 어우르며 지어낸 저 곡선. 그렇게 폭이 넓지 않는 선암사 계곡에 이만한 무지개다리가 있다니. 홍예(虹霓). 눈을 휘저으며 살피지만 그것도 잠시. 아프페지오로 연주하는 하프의 선율이 난간에 묻어나 여지없이 엷은 감성을 돋운다. 그래서 선암사로 가려면 여기서 눈물을 시작해야 되는가 보다. 해우소에서 통곡하려면. 운이 좋아 계곡에 물이 많으면 승선교는 원이 된다. 가운데 용머리 석상이 유난히 외롭지만 어떠랴. 그 외로움이 전체를 어울리게 만든다. 용머리가 없으면 다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니. 그렇다. 어느 물건인들 요체는 반드시 있는 법. 그 요체를 읽고 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처절한 감옥생활에 지친 두 사나이가 옥중의 창살로 밖을 내다보며 한 사나이는 '땅 바닥의 진흙탕'을 보았고, 다른 사나이는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보았다. 사나이가 그대라면 그대는 지금 '진흙탕'을 보고 있는가 '별'을 보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승선교의 그 용머리를 보고 있는가? 용머리로 눈이 가다보면 아름다운 정경 하나가 더 잡힌다. 승선교가 만든 그 원 또는 반원의 가운데를 강선루(降仙樓)가 단정히 자리하고 있다. 선녀가 내린 곳. 늘 선녀들은 없지만 선녀들이 남긴 흔적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물이며 바위며 나무며 산이며. 위에는 유난히도 푸른 하늘이며. 게오르규는 "천사는 제비처럼 추운 계절이 온다고 날아가 버리지는 않는다"고 '대학살자'에서 묘사했는데 우리들의 선녀들은 날아가 버리기보다는 온 사방에 흔적들을 남겨 오늘. 이처럼 아름다운 선암사를 함께 만들고 있지 않는가. 돌다리 승선교. 무지개 다리. 그 어디에도 채색의 영롱한 빛이라고는 없지만 왜 저토록 아름다울까. 흔히 무지개는 행복을 뜻한다. 박목월은 '행복의 얼굴'에서 "행복은 무지개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은 자취를 감춘다. 그것은 발견하는 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라며 행복을 너무 추구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말라는 경고를 준다. 듬직하고 덤덤한 돌다리 승선교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뜻을 읽을 수 있다. 무게와 함께 숱한 연륜을 이겨온 저 돌. '오셀로'에서 셰익스피어의 명구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 또한 돌과 얽힌 한마디. "나의 심장은 돌이 되어 가슴을 치면 속만 상할 뿐이구나!" 그렇지만 승선교에는 가슴 칠 일들이 있으랴. 이미 오랫동안 다리 위를 건넜을 스님들의 자취만 해도 이승의 그 어떤 속박에 구애받으랴. 경봉(鏡峰)스님 말씀따나 "멋지게 살아라.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한 번 멋진 연극을 하다 가거라"라던 그 사자후가 이 다리위에서도 어김없이 맴돈다. 스님이 이 돌다리와는 그 어떤 인연이 없다고 해도 '멋진 연극'은 누구나 해야 되는 연극 아닌가. 다리를 건너본다. 마음 다잡고 건너본다. 그래도 역시 돌다리. 무지개다리일 뿐. "이 마음 빈들이여/ 만리강 달바퀴 가을 구른다/ 반야에 능가경 읽노라니/ 잔나비 몰래와 밤알 훔쳐 가는구나(上人淸淨心 萬里秋江月 半夜讀楞伽 猿偸床下栗)" 석지현 스님이 번역하고 환성(喚惺)스님이 남긴 선시다. 겨울이 문턱이지만 깊어 가는 가을 밤. 능가경을 읽는 스님의 모습이 훤히 떠오른다. 새삼스레 무엇이 행복일까 생각해 보지만 마땅한 행복이 떠오르질 않는다. 저 경상아래 밤알 훔치는 원숭이가 행복일까. 그러다 떨어져 구르는 밤알 소리에 문득 깨치는 일도 더러는 있을 법 하건만. 일주문을 지나, 삼인당을 걷고. 선암매라는 늙은 홍매나무에 잠시 취해보고, 대웅전을 지나 원통전의 모란꽃 문틀에 기대보고, 와송에 고개 한 번 숙여 보고, 그 뒷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눈물이 나는지 잠시 눈시울을 만져보며 주춤거려 보고. 묘한 상념이 슬며시 오른다. 왜 하필 뒷간일까. 매화간, 측간, 변소, 화장실. 이런 변천사를 가진 뒷간. 그 외에도 측실, 측청, 청방, 서각, 정방, 회치장 등. 역사위에서 사라진 이름들이 고스란히 정겹다. 그 뒷간을 지나 다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승선교. 다리 아래 뭉쳐 개울물에 젖은 낙엽들이 내년 이맘쯤이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봄날이 화려하다는 선암사는 돌다리 승선교가 있어 이 겨울의 초입에도 무척 아름답다.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답다. 그것은 아마도 반듯하게 지워진 곡선, 저 무지개 같은 곡선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협찬:대구예술대학교 |
/글=김채한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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