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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마지막 추신이다 - 장석주

눌재 2010. 2. 23. 00:30

 

 음유시인 1 - 죽음은 삶의 마지막 추신이다

 

   장석주

 

내몸에 죽음의 입구와 출구가 함께 있다

최근 내 몸이 벼랑이다

어머니가 몸 속에 넣어주었던 노래들

이곳저곳 떠돌며 다 퍼내 써버리고

더 나올 노래가 없다

함부로 탕진해버린 그 노래들

혀는 낙엽처럼 말라버리고 말았으니

나는 내 유일한 악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장 거리를 걷다가

수조 속에 몸을 반만 담그고 떠있는 새끼 거북이를

날품팔이 노동자처럼 서서 바라본다

한 마리에 기백 원씩 팔려나갈

저 미천한 거북이에게 얇은 눈꺼풀이 있고

눈 꺼풀 아래엔 작은 눈도 있다

 

그 눈이 우주를 보듯 나를 본다

그 눈이

빈 몸 속에 장롱처럼 달려 있는

몇 개의 절망마저 꿰뚫어본다

 

나는 아무것도 고의적으로 은폐한 적이 없다

그 거북이의 눈길 속에

나를 통째로 방임하고 돌아선다

 

죽음은

이 지상의 삶에 부치는 마지막 유일한 추신이다

 

 

 

시를 말하다

 

 존재의 본질을 묻던 초기 시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모색하는 최근 시에 이르기까지 장석주는 변화하는 시대에 변치않는 인간 실존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는 시인이다. 현실 세계에 밀착된 그의 생활 감각은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다채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하고, 기존 제도의 바깥에서 삶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일관된 자세는 국외자의 면모를 빚어내다.다른 삶, 다른 세계를 향한 줄기찬 꿈은 그가 낭만적 열정과 충동에 뿌리를 두 시인임을 말해준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들, 어둠에 잠긴 인간의 모습을 예민하게 지각했던 장석주의 시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전환점으로 하여 새로운 변화의 도정에 들어선다. 이 시집에서 불행 절망 슬픔의 모태와는 다른 삶의 원천과 시의 근원을 발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 있으니, 그것은 산 자로서 죽음을 사유하는 일이다. 그에게 육체 속에 거하는 죽음의 자취를 확인하고 감가하는 일은 지상의 영원한 괴로움을 극복할 길을 찾는 역설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혀가 말라버린 '음유시인'은 소리를 잃은

악기의 비극에 비견되는 죽음의 형상에 가깝다.

 

 노래를 탕진한 가수 언어를 상실한 시인은 살아도 더 이상 산 자가 아니다. '음유시인1'의 화자는 그러한 자신의 몸을 죽음이 거주하며 들락거리는 입출구로 느낀다 부르려 애써도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보다 더한 고통은 그에겐 없다. 그 고통은 그에겐 없다. 그 고통의 정도란  ' 내 몸이 벼랑"인 상태, 몸 전체가 어두운 절벽이 되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그런 끔찍한 침묵의 몸체가 된 뒤 그가 할 일이란 시장거리를 배회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 친 "미천한 거북이"의 작은 눈 앞에서 정체를 잃은 자로서 자괴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게 낮은 존재의 투명한 무심함보다  '나'의 무능과 부끄러움과 죄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는 까닭이다. 죽지 않았으되 이미 죽은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보다 잔인한 생이 또 있을까?자기 정체의 본원을 잃은 어느 은유시인의 고백이 만일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다면, 그 이유는 나도, 당신도 얼마간 그를 닮았기 때문일지 모른다."나를 통째로 방임한 "자들로,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는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