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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화첩기행]④세렝케티로 가는 길

눌재 2010. 5. 12. 20:24

[아프리카화첩기행]④세렝케티로 가는 길
원시와 야생이 어울린 끝없는 초록세상…
킬리만자로를 뒤로하고 다시 초원을 달린다. 사파리 지프에 텐트와 먹을 거리를 싣고 모시에서 세렝게티까지 내닫는 데는 적어도 7시간 이상 소요된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떠가는 흰 구름을 벗 삼아 평원에 '나'를 내맡긴다. 사바나 수목 사이로 간간이 마사이족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지나치는 풍경은 마치 서양인들이 찍어 놓은 조선 시대의 우리네 초가마을을 연상시킨다. 소똥을 짓이겨 벽체를 만들고 풀로 지붕을 엮어 덮은, 서너평이 될까말까 하는 원형의 집들이다. 어린시절 도화지 위에 크레용으로 나란히 그렸던 초가집 모양도 그랬다.

#야생에 중독되다

얼마를 지났을까, 길가 언덕배기에 울긋불긋한 사람들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차를 세웠다. 마사이족 장터(마사이마켓)다. 먼 길 짐을 싣고 온 나귀들이 장터 주변에서 쉬고 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에 나오는 허생원의 나귀도 저랬을 것이다.

좌판엔 온갖 생필품들이 팔리고 있다. 그 한켠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어 기웃거려 보았다. 바로 야바위꾼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물건을 사라며 집요하게 달려드는 이들을 피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차에 올라 길 반대쪽 초원을 바라보니 집단목욕 신이 펼쳐지고 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10여명의 마사이 남성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목욕 중이다. 남성을 드러내며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일행 중 여선생이 아프리카 흑단조각을 보는 것 같다며 환호성이다. 민망해하기는커녕 좋아 어쩔 줄 몰라한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야생에 중독돼 가고 있는 것이다.

#초록의 마법에 걸리다

산마루를 하나 넘으니 온통 초록 세상이다. 세렝게티가 저 멀리서 손짓한다. 게이트에서 진입을 기다리는데 이름모를 작은 새들이 몰려든다. 여행자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먹을 것을 던져주고 싶었지만 빵 조각 등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안내문의 경고문구를 보고 단념했다.

세렝게티는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란 뜻이다. 경북도 크기만한 곳이 평탄한 풀밭이다. 세렝게티는 ‘동물의 왕국’ 류의 TV다큐 촬영지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영국의 BBC는 이곳을 중심으로 140개의 촬영팀을 운영하고 있다. 사자 전문팀만 24개나 될 정도다. 직원 100명에 현지인 등 계약직만 2000명에 이른다.

초원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들어서니 구름 그림자와 햇살이 연출해내는 초록의 스펙트럼이 장관이다. 아프리카에서 초록 색깔 표현만 20가지나 된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석양의 초록은 검정과도 경계를 허문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선 검은색 표현도 40가지나 된다. 김종우 작가가 캔버스 위에 초록을 풀어 놓은 풍경이라고 한마디 거든다. 초록이 하늘까지 뻗친다. 초록바다에 잠겨가는 느낌이다.

#별이 쏟아지는 초원의 캠프장

◇권순익의 ‘즐거운 날’. 초원 위에 풀어 놓은 작가의 원초적 심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세렝게티 초원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원초적 고독이 몰려온다. 특히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고목은 박수근의 그림에서 보는 나무를 닮았다. 단순한 선의 미학은 한 폭의 동양화다. 초원과 하늘을 여백으로 저 홀로 서 있는 폼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감성을 자극한다.

사바나 초원 위로 해가 떨어진다. 누 한 마리가 엉거주춤 서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탁발을 마치고 산사로 돌아가는 수도승의 모습이다. 그 옆은 얼룩말들이 바삐 지나고 있다. 이제 모두들 하루를 마감할 시간인 것이다. 서둘러 캠프장으로 차를 달렸다. 어둠이 깔리자 운전기사가 서너번 길을 헤매는 통에 오후 8시를 넘겨서야 캠프장에 도착했다. 시설이라야 숯불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간이 주방시설과 물탱크가 전부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고기와 빵을 구워 저녁을 때웠다.

고기 냄새를 맡고 캠프 주위로 하이에나가 기웃거리다 달아난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다. 어린시절 여름날 마당에 깐 멍석 위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쳐다봤던 하늘을 닮았다.

새벽녘 이름모를 동물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보름달이 텐트를 비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권순익 작가는 텐트 밖에 여전히 정좌하고 생각에 잠겨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스케치북에서 춤추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린다. 어둠 속 초원에 화가는 어떤 상념들을 풀어 놓고 있는 것일까.

#텐트 위에 맺힌 아침이슬

지난밤 텐트 밖에 켜놓은 호롱불 주위에 죽은 날짐승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수백만 마리를 족히 넘길 듯하다. 여전히 생명을 놓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놈들도 있다. 누군가 종이뭉치를 가져다 눌러 안락사를 시킨다. 불빛만 보고 달려든 죗값 치고는 대가가 혹독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네 인생도 불나방 같은 삶이 아닐까.

텐트를 걷으려니 아침이슬에 흠뻑 젖어 있다. 고지대라 일교차가 크다는 얘기다.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하고 서둘러 초원으로 나섰다. 세렝게티에선 12월∼3월에 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7월 말∼9월에는 케냐의 마사이마라에서 풀을 뜯던 동물들이 물을 찾아 이동해 온다. 누와 얼룩말 등이 무리를 지어 강을 건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강속에서는 악어가, 강가 기슭에서는 사자 등 육식동물들이 노리고 있지만 초식동물들은 위험을 감수한다. 더 많은 물과 풀을 찾아 새끼를 낳으려는 본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연의 모성적 본능이다.

세렝게티 초원에는 작은 바위언덕들이 초록바다 위의 섬처럼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 치타, 하이에나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간혹 나무에 올라 앉아 사냥감을 기다리는 사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오 무렵에서야 뙤약볕 초원 위에 누워 있는 사자 가족과 조우했다. 더위에 지친 듯 꼼짝도 안 한다. 수사자는 보이질 않는다.

#누와 얼룩말의 공존의 비밀

누떼와 얼룩말 무리가 한데 어울려 이동하고 있다. 같은 종이 아님에도 그들은 왜 같이 붙어다닐까.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색맹인 누는 20㎞ 밖의 냄새까지 맡는다. 후각이 안 좋은 얼룩말은 15㎞ 밖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동거인 셈이다.

시각적인 면에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얼룩말의 얼룩무늬는 사자의 방향감각을 잃게 한다. 달려드는 사자를 피해 껑충껑충 뛰어가는 얼룩말의 얼룩무늬는 사자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누가 얼룩말과 함께 뛰면 사자를 피하기 쉽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늘 허기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초원의 생명들은 더불어 숨쉬는 생명법을 가르치고 있다. 두 작가의 화폭에 누와 얼룩말이 어떤 화두로 자리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화폭에서 온갖 것들이 함께 노닐고 있다, 축제다.

세렝게티(탄자니아)=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