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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7〉 적도의 싱가포르-아시아 와인문화

눌재 2010. 6. 10. 02:43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7〉 적도의 싱가포르-아시아 와인문화의 꽃
‘문화의 용광로’ 싱가포르 와인에 빠지다
  • “소리 내지마, 움직이지마.”

    가수 이승철이 부른 노래 구절이 아니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싱가포르의 나이트 사파리 안내원이 하는 말이다. 야간 동물원에 들어오면 ‘꼼짝 마라’다. 소리 내서도, 빛을 보여서도 안되고 움직여서도 곤란하다. 꼬마 기차에 올라 시키는 대로 따르며 참고 또 참으면 곧 기쁨이 온다. 오랜 긴장 속에 찾아오는 이 기쁨은 야행성 동물들을 지근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쁨이다.  

    ◇‘해변가 1번지’ 주소를 가진 래플스 호텔. 간척하기 전에는 이 호텔이 바닷가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심 한복판에 호텔이 있어 과거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사진제공 www.raffles.com
    싱가포르에서는 담배 꽁초나 휴지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된다. 인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껌의 자취는 찾기 어렵다.

    껌은 약 20년 전부터 제조, 수입, 판매 모두가 불법이다. 그러나 치외법권 지역 같은 곳이 있으니, 거기는 바로 싱가포르의 상징과도 같은 래플스 호텔의 한 간이주점이다. 롱 바에서는 일탈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커피나 맥주 등을 파는 롱 바에서는 안주로 나오는 땅콩 껍질을 아무데나 버리게 한다. 그 동안 참았던 배설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질서를 지키는 것이 미덕인 문화인에서 아무데나 버리는 원시인이 되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롱 바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의 발상지다. 슬링은 한자어 ‘사령’을 일컫는데, 한 영국군 사령관이 롱 바의 바텐더에게 여성이 마실만한 음료수를 하나 만들어 보라는 요청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 가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래플스 호텔로 간다. 롱 바를 찾아가서 싱가포르 슬링 한 잔을 주문한다. 기다리는 동안 땅콩을 까 먹으며 그 껍질을 발 밑으로 무심히 버린다. 이걸 하지 않으면 싱가포르를 여행한 게 아니다.

    ◇오차드 거리에 있는 와인샵 비눔의 내부. 공항에서 와인값의 7%를 환급받을 수 있다.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경이 싱가포르에 상륙한 때는 1871년. 그는 현지인과 현지문화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는다. 그는 오래 전에 사라졌으나 그의 이름만은 싱가포르 곳곳에 살아 있다. 넘버원 호텔 래플스, 초고층 호텔이 있는 래플스 시티 쇼핑센터, 그 밖에 래플스 중고교, 대학교 등 그의 이름이 미치는 곳은 모두 국가대표 급이다. 우리나라 샴 쌍둥이 자매의 분리수술이 성공한 곳도 역시 래플스 병원이고, 국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 역시 래플스 대학 출신이다. 래플스 호텔은 찰리 채플린, 마이클 잭슨, 서머셋 모옴 등이 머물렀던 곳으로 1991년 쌍용건설이 멋지게 리노베이션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래플스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섬 싱가포르에 대규모 해외 이민자를 불러들여 오늘날 다문화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독립국가로 기틀을 잡았지만, 그 기저에는 래플스의 도시계획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123년 된 래플스 호텔이 45년 된 싱가포르의 상징인 게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의 이주정책으로 조성돼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차이나타운, 인디아마을 같은 지역은 싱가포르의 다채로운 문화적 색조를 발휘하며 전세계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음식 평가로 유명한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하는 또 다른 항목 즉 관광 분야의 평가인 미슐랭 그린 가이드는 싱가포르의 수많은 관광지 중에 불과 네 군데에다만 최고점 별 세 개를 부여했는데, 나이트 사파리와 래플스 호텔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싱가포르의 와인문화는 어떤가. 대한민국 인구의 10%도 되지 않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두 배가 되는 부유한 싱가포르는 와인 소비도 활발하다. 싱가포르에 사는 와인저널리스트 제니 탄(Jenny Tan)은 “싱가포르 경제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소비가 늘었다. 특히 1990년대에 건설 경기가 활황이었을 때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등의 신규 수요가 창출되면서 와인 소비는 왕성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 기고문에서 싱가포르의 와인 시장 규모를 밝혔는데, 2007년 실적을 비교할 때 물량은 비슷하지만 금액은 한국의 세 배 규모다. 그러니 인구 비례로 보면 싱가포르의 와인시장은 우리의 30배에 달한다.

    싱가포르에서 와인 음용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다름아닌 와인 값이 싸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와인에 과세를 별로 하지 않는다. 일률적으로 병당 8싱가포르 달러(이하 달러)를 부과하던 것을 최근 들어 알코올 도수에다 70달러를 곱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15도 와인은 병당 10.5달러, 12도 와인은 8.4달러만 부과한다. 여기에다 소비세 7%를 얹으면 소비자가격이 산출된다. 싱가포르는 세금을 종량세로 처리한다. 그러니 종가세로 적용하는 우리와는 가격 차이가 심하게 난다. 예를 들어 현지가격 30만원 하는 샤토 마고 한 병이 싱가포르에서는 30만8000원 가량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50만4000원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싱가포르 인들보다 39% 더 비싸게 와인을 마시는 꼴이다.

    싱가포르에서는 가격 기준으로 프랑스 와인, 물량 기준으로 호주 와인이 많이 팔린다. 프랑스 고급 와인을 주로 수입 유통하는 비눔의 클리포드 첸(Clifford Chen)은 “보르도 와인이 가장 인기가 좋다. 부르고뉴는 밭에 따라 와인이 달라지지만, 보르도는 샤토에서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와인만 만드니 외우기도 휠씬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싱가포르의 기성 세대에게 보르도 와인은 특별해서, 나는 라피트를 마신다 혹은 나는 마고를 마시는 사람이야 같이 와인이 자신을 나타내는 분신처럼 기능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다양한 와인에도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어 프랑스 와인 외에도 호주, 이탈리아, 뉴질랜드 등 여러 와인을 골라 마신다”고 말을 맺었다.

    우리 한국은 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와인 수입이 개시됐었다고 말하자, 제니 탄은 “싱가포르 와인 문화에서 그와 같은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다만 싱가포르가 자유무역항이고 일찌감치 서양인들이 많이 방문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와인을 음용해 왔다”고 했다. 

    ◇오차드 거리에 있는 쇼핑센터 야경.
    와인 소비가 일본처럼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싱가포르의 와인 종사자들도 최근에 맞이한 일에 대해서는 기대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 3월 센토사섬에 리조트 월드를 개장하면서 유니버설 스튜디오 테마공원과 카지노를 조성해 관광의 저변을 확대했다. 특히 미슐랭 가이드 별 세 개에 빛나는 조엘 로부숑 등의 유명 쉐프들이 그 곳에 레스토랑을 개점하도록 도왔다. 특히 리조트 월드의 와인 리스트는 관심이 초점이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가 자랑한 와인애호가 엔 케이 용이 컨설팅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와인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양인으로 서양에 알려져 있으며, 몇 년 전 80회 생일을 치르는 등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은퇴한 심장외과의사이다.

    그 생일잔치를 위해 전세계 무려 62군데 양조장 주인들이 모였으며, 저마다 무상으로 와인을 기증했다. 곧이어 자선 경매가 벌어졌는데, 소더비의 와인경매 최고책임자 세레나 서클리프가 순순히 경매사로 나섰다. 베테랑의 호기 어린 진행으로 경매 수익금은 80만 싱가포르 달러(약 6억5000만원)나 됐으며, 엔 케이 용은 이를 전부 자선단체에 헌납해 훈훈한 정을 보여 주었다. 그가 그 많은 와인메이커들을 생일잔치에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싱가포르가 전략적 요충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비단 무역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싱가포르는 와인산업에서도 역시 전략적 거점이다. 문화의 용광로이면서 영어를 모국어로 채택한 싱가포르는 서양인에게 친절한 동양으로 인식돼 많은 서양인들이 뿌리를 내리려 하는 곳이다. 싱가포르 와인 챌린지를 주관하는 프랑스인 로데릭, 마그마 레스토랑을 통해 고향의 와인과 음식을 알리려는 독일인 다그마, 자국의 우수 와인 브랜드를 소개하려는 오스트리아인 마이클 등 많은 서양인들이 앞다퉈 싱가포르에 회사를 차린다. 적도에 근접하여 숨막히도록 무덥고 습한 나라가 어째서 부자로 살고, 어째서 와인 선진국이 됐는가에 대한 해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글·사진=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올댓와인’ 저자)

    ◆추천 와인샵 비눔(www.vinum.com.sg)

    싱가포르 쇼핑 일번지 오차드 거리로 가는 발걸음은 흥겹고 가볍다. 나라 전체가 면세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러니 물건을 살 때 소비세만 내면 된다. 7%. 이마저도 공항에서 환급 받을 수 있다. 오차드 거리 메리어트 호텔 맞은 편에 서 있는 쇼센터 3층에 와인샵 비눔이 있다. 사무실 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이 곳은 프랑스 고급 와인을 주로 취급한다. 싱가포르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레자미(www.lesamis.com.sg)가 바로 옆 칸에 있는데 둘은 계열사 관계다. 4월에 싱가포르에 간다면 ‘꿩 먹고 알 먹기’다. 세계미식가대회(www.worldgourmetsummit.com) 이벤트에 참여하면 진기한 음식과 좋은 와인의 궁합을 봐가며 맛볼 수 있어 좋다.
기사입력 2010.05.12 (수) 17:14, 최종수정 2010.05.13 (목)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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