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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8〉 파노라마와 안개속에서 꿈꾸는 중세

눌재 2010. 6. 10. 02:45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8〉 파노라마와 안개속에서 꿈꾸는 중세 와인마을-브루넬로 와인<세계일보>
해발 564m 전형적 토스카나 산성마을
동네 전체가 돌로 된 성냥갑 같아
꽉 막힌 숙성통에 갇혀 있는 브루넬로
‘제우스의 피’처럼 깊은 맛 우러나와
  • “토니 블레어, 우디 앨런, 마돈나, 블라디미르 푸틴….”

    차분히 또박 또박 발음하지만 잔뜩 고무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회자는 이 이름들의 주인공 모두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발표했다. 그런 다음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 ‘로칸다 로카텔리’가 2010년 ‘올해의 황금 월계관’의 주인공이라고 하자, 수상자와 시상자들이 좁은 무대를 가득 채웠다. 지난 18년간 이어져 온 ‘빈티지 품평회’는 매년 2월이면 어김없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몬탈치노에서 벌어진다.

    ◇몬탈치노성 꼭대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 본 광경. 마을은 산꼭대기에 조성돼 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이하 브루넬로)는 무엇인가. 애호가라면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발음할 수 있지만, 보통은 외우기 힘든 긴 이름의 와인이다. 뜻은 몬탈치노 마을의 브루넬로 포도로 만든 와인. 브루넬로는 토스카나의 대표 품종 산지오베제의 사투리 격으로 몬탈치노 마을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는 산지오베제 변종(클론)을 칭한다.

    브루넬로는 DOCG등급의 레드 와인으로 오래도록 숙성을 거친 후에 출시되는 대표적인 이탈리아 고급와인이다. 2010년 2월 몬탈치노에서 첫 선을 보이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빈티지는 2005. 그러니 5년이 지나야 등장한다. 같은 품종으로 만들지만 키얀티 클라시코나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보다 더 강건하며, 무겁고 깊은 맛을 주므로 애호가들이 아끼는 와인이다. 

    ◇양조장 비욘디 산티로 가는 길에 우뚝 솟아 있는 싸이프러스 나무들. 토스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이라고 꼽고 싶다.
    몬탈치노의 어원은 ‘참나무 숲이 울창한 산’이다. 해발 564m 꼭대기에 있는 성은 1361년에 축조되었고, 성 주변에 형성된 촌락은 이곳이 전형적인 토스카나의 산성 마을임을 말해준다. 몬테풀치아노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 유적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다. 멀리서 마을을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마치 돌로 된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고고학 전공자라면 그 중에 로마 시대 이전의 유물도 발견할 것이다. 깊이 잠들어 있는 산성 고도 몬탈치노, 수백 년 된 예배당과 프레스코 예술품, 그리고 2000년 이상 묵은 돌무덤이 누워 있는 고요한 마을 몬탈치노에서도 금요일 밤이 되면 주민들이 깨어난다. 화려하게 기지개를 켜며 중심가로 모여든다.

    몬탈치노를 20년 이상 다녀본 독일 와인거래상 요한 슬라비는 필자에게 최고의 레드 와인 고장에서 샴페인으로 3차까지 즐기는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우선 몬탈치노는 산이라서 해가 일찍 지고 또 상점 창문이 거의 동향이라서 더 빨리 어두워진다. 그러니 1차는 전망이 좋은 곳을 골라야 한다. 몬탈치노에서는 입구를 보고 가게를 판단하면 안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와’하는 탄성이 나오는 중세의 돌지붕에다 마음까지 환해지는 큰 창이 나 있기 때문이다. 1차는 언제나 오스티초에서. 시계탑 아래로 가자. 그 주변 이름은 포폴로 광장. 여기가 몬탈치노의 중심이다. 오스티초는 갖가지 샴페인 종류와 확 트인 전망이 유명하다. 스파클링 와인을 양조하지 않는 지역 양조가들은 오스티초의 샴페인이 특식거리라고 여긴다. 요기를 좀 하고픈 마음이 들 때 2차를 가야 한다.

    알레 로게가 다음 행선지. 오스티초에서 나와 몇 걸음만 걸으면 된다. 여기는 한국 돈으로 계산해 만원만 내면 와인 한 잔에 각종 간이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금요일 밤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어댄다. 거기가 바로 알레 로게다. 공간이 좁아 손님이 밖에서 마신다. 적당히 집어 먹지 않으면 저녁을 못먹게 되니 유념하시길.

    생햄 ‘프로슈토 크루도’ ‘소프레싸타’라는 돼지머리 눌린 것(새우젓만 있다면 환상적일 텐데), 마르게리타 피자, 토속 치즈 페코리노, 비스킷, 마른 안주 등등 끝없이 제공된다.

    최종 행선지는 1888. 브루넬로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연도를 기념하는 선술집이다. 알레 로게 맞은 편에 있다. 몬탈치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양조장 비욘디 산티의 지하 셀러에는 브루넬로 역사상 최초 빈티지 1888 와인이 두 병 남아 있다.

    몬탈치노 여행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창문을 살핀다. 오늘 하루의 날씨를 무척 궁금해한다. 날씨만 좋으면 만사형통. 맑기만 하면 지중해도 볼 수 있다는 곳은 산 너머 동네지만, 쾌청한 날이면 굽이치는 구릉들이 마치 정선의 산수화폭처럼 끝간 데 없이 펼쳐져 바다처럼 보인다. 하지만 3월까지 계속되는 지중해성 기후의 겨울은 일기가 불순하고, 안개가 많아 일주일의 반 정도는 눈 뜨자 마자 실망한다.

    브루넬로는 4년 동안이나 안개처럼 꽉 막힌 숙성통에 갇혀 있어야 한다. 강한 타닌을 달래기 위해서는 시간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긴 숙성기간은 양조장의 대차대조표를 붉게 물들인다. 그래서 조합은 ‘로쏘 디 몬탈치노’(이하 로쏘) 와인을 허용했다. 올해는 브루넬로 2005와 함께 로쏘 2007이 출시된다. 수령이 어린 포도나무로 만들며 숙성을 덜 하는 까닭에 로쏘는 가볍고 온화한 느낌이라 어떤 음식에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브루넬로는 10년 정도 지나야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는 자연의 맛이 난다. 하지만 빈티지가 대단했던 1997 혹은 2004는 20년 이상 숙성될 힘을 지니고 있다. 

    ◇전직 비행사가 만드는 체르바이오나 와인은 몬탈치노의 대표 와인으로 소량 생산하는 고품질 브루넬로다.
    몬탈치노 골목을 산책할 때는 꼭 식사한 후라야 한다. 고기 소스 ‘라구’를 끓이는 냄새가 골목에 자욱하며, 그 향기나 얼마나 구수하고 강력한지 삽시간에 코 끝에 배 속에 찰싹 달라붙는데, 만약 여행자가 시장하기라도 하면 정신까지 혼미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금방 배고프게 만드는 동네의 성격은 그 허기짐으로 인해 뭐든지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반대하는지 모른다.

    베를루스코니계 정치인 로베르토 토르톨리는 영국 시사지 ‘뉴 스테이츠맨’과의 인터뷰에서 “토스카나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블랙홀과 같다. 반정부, 반글로벌주의, 반미 등 모든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토스카나 사람들은 영혼이 자유롭다. 어디에 얽매이기 싫어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산꼭대기에서 독자적인 삶을 영위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지로부터는 결코 독립하려 하지 않는다. 아예 대지에 코를 박고 산다. 와인에도 이 정신이 적용된다. 산지오베제의 가장 정연한 맛이 나오는 몬탈치노 언덕은 대지에 기대어 사는 촌부들의 생활 터전이다.

    세상을 가로 막던 안개도 바람이 불고 햇살이 강해지면,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처럼 언제 그랬냐며 삽시간에 사라진다. 1888의 위대한 유산으로 출범한 브루넬로는 불어난 양조장들의 결여된 품질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안개는 결국 걷히는 법이다. 힘을 다해 대지에 의지하기만 하면….

    개척자 비욘디 산티가 최근에 출시한 2004 리제르바는 다시금 브루넬로를 위대한 와인의 반열에 오르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농밀하면서도 맑고 담백하며, 여리면서도 강하고 단단한 이 모순적인 맛은 1955처럼 세기를 대표할 와인 후보다. ‘제우스의 피’ 산지오베제의 가장 깊은 맛은 몬탈치노에서 나오기 때문에, 토스카나의 순수한 영혼을 찾는 여행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글·사진=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올댓와인’ 저자)

    ■추천

    ◇리스토란테 ‘알 자르디노’가 선보인 검은 송로버섯을 얹은 탈리올리니 파스타 요리. 신선하고 쌉싸름한 버섯 향취가 싱그럽다.
    리스토란테 ‘알 자르디노(www.ristorantealgiardino.it)’는 포폴로 광장에서 마치니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3∼4분 걸으면 길가 왼편에 바로 있다. 30석 미만으로 작지만 우아하고 편안한 실내 분위기에 와인 리스트도 잘 갖춰져 있다. 남편 조반니가 요리하고, 아내 파올라가 서빙하며, 젊은 소믈리에도 적시에 와인을 채우며 한몫 한다. 투박한 중세 고도 몬탈치노에 거의 없는 조용한 분위기가 매력이다.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맛을 위해서라면 꼭 들러봐야 한다. 특히 폭을 넓게 만든 파스타 탈리올리니에 갓 채취한 검은 송로버섯을 단면으로 얇게 썰어 얹은 계절 특식은 아주 신선하고 맛있다. 땅 속에서 자라는 송로버섯 특유의 식물성 향기가 싱싱하게 올라온다. 조반니는 “송로버섯은 그것으로 유명한 마을 산조반니 다쏘에서 공급받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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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26 (수) 18:00, 최종수정 2010.05.26 (수)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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