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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지구 반대편에서 맛본 ‘신의 물방울’

눌재 2011. 6. 28. 19:01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지구 반대편에서 맛본 ‘신의 물방울’<세계일보>
눈 쌓인 겨울의 안데스 산맥… 4000㎞가 넘는 태평양 연안…
  • 기다란 비행기 복도에서 무료함을 달래려 왔다갔다 하며 꼬박 하루 이상을 날아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긴 나라 칠레로 가는 길에 횡재를 만났다. 무료함 끝에 벅찬 감동이 찾아왔다. 수도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기 얼마 전 비행기 왼편으로 보이는 안데스산맥 가운데 유독 봉우리가 솟은 곳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긴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연방 눌러댔다. 아콘카과. 안데스산맥의 최고봉이며 남북 아메리카의 지붕이다. 10㎞ 상공에서 내려다본 7㎞의 봉우리 아콘카과는 여행자를 멀리서 환영하고 있었다.

    ◇칠레 대표 양조장 에라수리스 뒤로 보이는 눈 쌓인 겨울의 안데스산맥. 낮게 보이지만 해발 2000m 이상이다. 최고봉 아콘카과는 6972m.
    와인맛보기 대회인 카타도르 그랜드 하얏트(www.catador.cl)의 서막이 오를 때 심사위원들을 즐겁게 만든 음식은 다름 아닌 한식이었다. 여행자의 수백 번의 만찬장에서 한식이 메뉴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국땅에서, 더군다나 지역 유명 와인행사에서 맞이하는 한식은 특별히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이날은 카타도르의 서막이자 주칠레 한국대사관이 마련한 한식행사 첫날이기도 했다. 대사관 초청으로 서울 그랜드하얏트에서 날아온 김재문 셰프와 조원기 셰프는 “재료와 기물이 부족하고, 현지 스태프의 근성이 부족해 만찬 준비하느라 힘들었지만 즐겁게 식사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통해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양갈비 아사도. 먹음직스럽지만 실제로는 짜서 즐기진 못했다. 칠레 사람들은 고기 요리를 할 때 특히 소금을 많이 쳐서 먹는다.
    행사 개막일 만찬의 메뉴는 한 입 크기로 마련되었는데, 파티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하며 육회, 계란말이, 두부버섯꽂이, 호박죽, 생선전, 연어김치말이, 떡 등을 즐겼다. 왼손에는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혹은 카르미네르, 피노누아 등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새로운 음식을 연방 맛보고 있었다. 행사 마지막 만찬은 테이블 세팅부터 달랐다. 둥근 태극 문양을 테이블 위로 내리게 해서 한국의 이미지를 살렸다. 전채로 나온 빈대떡은 소비뇽 블랑과, 이어 나온 약식 삼계탕에는 샤르도네, 갈비구이엔 카르미네르가 좋은 앙상블을 이뤘다.

    국내 와인 수입 통계에서 수입량 1위, 수입액 2위를 차지하는 칠레 와인은 우리나라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의 품질이 훌륭해서 애호가들은 칠레의 레드 와인은 즐겨 마신다. 실제로 칠레 레드는 우리 고기 반찬에 썩 잘 어울린다. 하지만 만찬 메뉴에서 보는 바대로 칠레에는 화이트 와인도 있다. 특히 소비뇽 블랑의 품질이 뛰어나다.

    ◇칠레대사관 상무관 에르난 구티에레스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추천한 이비스 데 푸에르토 바라스(www.ibisdepuertovaras.cl)의 신선한 세비체. 절여진 각종 해산물이 잔뜩 들어 있다.
    보르도에서 처음 열린 2010 소비뇽 블랑 세계대회에서 칠레는 종주국이자 개최국인 프랑스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메달 수로는 프랑스에 밀렸으나 입상률 30%의 프랑스보다 높은 36%를 기록했다. 칠레는 소비뇽 블랑뿐 아니라 샤르도네, 비오니에 등도 품질이 좋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칠레의 음식 문화를 보면 답이 보인다. 국토 모양이 뱀장어처럼 길게 생긴 칠레는 태평양 연안과 4000㎞ 이상을 연하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연어의 경우 칠레는 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수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해산물 강국이다. 

    칠레의 음식문화는 어떨까. 역시 해양 국가답게 다채로운 수산물을 음식 재료로 삼지만 칠레 고유의 음식 가짓수는 다양한 와인의 종류만큼 즐비하진 않다. 칠레는 플랜테이션을 위해 이민 온 여러 민족의 다양한 음식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게 현실이지만, 인근 국가와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해산물 부문에서는 오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페루의 음식문화가 범람해 있고, 고기 부문에서는 쇠고기의 천국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식 바비큐 ‘아사도’가 발달해 있다. 소갈비나 양갈비를 장작불로 서서히 구워내는 아사도는 칠레의 뚝심 있는 카르미네르나 카베르네 소비뇽과 딱 알맞다.

    ◇한식 페스티벌의 만찬장에 등장한 칠레 전통주 피스코 사우어(Pisco sour)
    유명한 해산물 요리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문호 파블로 네루다가 즐겨 먹은 생선 콘그리오 수프가 있고, 파마산 치즈를 얹어 데워 먹는 키조개 요리, 밀가루를 입혀 튀겨 내는 피조개 요리가 맛깔스럽다. 해산물 요리 중 대표적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세비체(Ceviche)다. 생선살이나 조갯살을 시트러스에 절여 먹는 세비체는 레스토랑의 전채로 혹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할 때 주로 선보이는 메뉴다. 침이 고이는 신맛의 세비체는 생선 비린내를 없애고 살균 효과도 있는 일종의 저장 음식이다. 양파나 아히(고추의 일종)를 많이 넣는 페루 세비체와 달리 칠레 세비체는 스파이시한 맛이 덜하며 대신 재료의 맛을 살려 담백한 맛이 난다. 칠레 사람들에게는 사실 와인보다는 전통주 ‘피스코’가 더 익숙하다. 피스코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로 도수로 보면 소주 같고, 생김새로는 막걸리와 비슷하다.

    아직도 칠레 와인에는 카베르네 소비뇽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 칠레 와인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16세기 스페인에서 들여온 미사용 와인의 재료 파이스(Pais, 혹은 미션)가 칠레 땅을 여전히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스는 피스코의 재료이기도 하지만 벌크 와인 값이 카베르네 소비뇽의 절반에도 못 미치기에 농부들은 언제든지 파이스를 갈아엎을 준비가 되어 있다. 칠레 와인은 칠레 바다의 매력적인 수산물을 고려할 때 화이트 와인도 매력이 있으니 앞으로는 레드 와인에만 매달리지 말고 청정지역에서 나오는 화이트 와인도 기억하자.

    ■추천 

    ◇칠레의 대표적인 와인체인 문도델비노의 W호텔점은 다양성과 규모를 고루 갖추었다.
    #와인숍1. 문도델비노(www.elmundodelvino.cl)


    칠레의 간판 와인숍이다. 쇼핑몰이나 비즈니스 거리에 지점을 두고 있어서 접근이 용이하다. W호텔 1층에 위치한 지점은 대형 서점 같은 규모로 칠레 와인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서울에도 이런 규모는 없으며 남미에서도 손꼽히는 크기다. 남미 최초의 마스터 소믈리에 엑토르 베르가라가 책임자다.

    고급주택가에 위치해 개인 고객 위주로 심화된 와인 쇼핑을 제시하는 와인숍 와인.
    #와인숍2. 와인(www.wain.cl)


    아방가르드 와인 문화의 선구자다. 기존 와인숍의 구태의연한 모양을 탈피해 시각적으로 주목하게 한 비주얼 효과가 인상적이다. 지역별로 와인을 늘어놓지 않고, 목적에 맞춰 배열했다. 와인 교육장도 달려 있고, 키친을 마련해 음식을 통한 실용적인 접근을 추구한다. 고급주택가인 알롱소 데 코르도바 거리에 있으며 주변에 멋진 레스토랑이 많다.

    글·사진=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올댓와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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