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와 여행▶/고고,미술,문화

CEO를 위한 미술산책] 자세의 혁명 콘트라포스토…조각상에 자유를 부여하다

눌재상주사랑 2013. 11. 25. 10:55

CEO를 위한 미술산책]  자세의 혁명 콘트라포스토…조각상에 자유를 부여하다

2013-11-01 21:05:49
수정
2013-11-02 05:27:30

2013-11-02 A22면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19) 그리스 고전기 조각과 '창을 든 남자'
아나비소스의 ‘쿠로스’(왼쪽)와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자’.

아나비소스의 ‘쿠로스’(왼쪽)와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자’.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는 오른손을 동그랗게 오그리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원래 창을 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전사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이었던가. 우리에겐 ‘창을 들고 가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 고전기(기원전 5세기) 조각이다.

설령 조각상의 주인공이 인간이라 해도 그는 후대 조각가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다. 조각의 제1원리인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제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비’ 또는 ‘반대’라는 뜻을 지닌 콘트라포스토는 무게 중심을 실어 땅바닥에 내디딘 다리와 그 반대편의 발걸음을 옮기는 다리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 하면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면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같은 쪽 어깨를 위로 들어 올리고 반대편 어깨는 아래로 낮추듯이 말이다. 콘트라포스토는 움직이는 신체가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균형의 미학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아나비소스의 쿠로스’에서 보는 것처럼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는 미케네문명(기원전 1600~1000년) 시절부터 이집트와 활발히 교류했는데 그곳으로부터 조각의 기본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장인들은 신체를 23.5등분 해서 머리, 허리, 무릎 등 신체 부위의 위치를 엄격하게 준수한 완벽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각의 재료로 즐겨 사용한 대리석은 역동적인 자세를 표현하는 데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조그만 충격에도 취약해서 팔을 수평으로 처리하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곧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 초기 조각가들은 대리석을 포기하고 대신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견고한 재질의 청동은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청동상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전쟁이 잦았던 그 시기 청동작품들은 곧잘 무기 제조를 위해 전용되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청동조각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0.01% 미만의 행운에 힘입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전부 로마시대에 청동제 오리지널을 보고 만든 복제품이다.

무력은 그리스를 능가했지만 로마인들은 문화적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그리스 예술품을 열렬히 신봉해 그리스에 가서 청동상을 구해 와 자신들의 정원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동상은 곧 품귀현상을 빚어 귀족들은 장인에게 대리석 복제품을 만들게 해서 자신들의 갈망을 채웠다. 오늘날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대리석상은 대부분 그리스 청동상을 모델로 해서 로마시대에 복제한 것들이다.

 
아 참, 폴리클레이토스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 아르고스에서 태어난 그는 조각 솜씨만 탁월했던 게 아니라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카논(Kanon)’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이상적인 신체를 7등신으로 규정했고 사람이 양팔을 벌린 길이는 신장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비례의 규칙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그대로 작품에 적용해 자신의 타당성을 실제로 입증하기도 했다.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표현한 그의 조각은 당대 그리스인들을 열광시켰다. 덕분에 폴리클레이토스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조각상들을 자유롭게 했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 작업실에 갇혀 지내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유는 늘 많은 희생과 높은 품삯을 요구하나 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