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아름다운 비너스상의 비밀…신의 가면 뒤에 가린 인간 욕망입력
- 2013-11-08 21:38:25
- 수정
- 2013-11-09 02:06:45
- 2013-11-09 A20면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20) 비너스상의 역설
요즘은 좀 열기가 식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인대회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빅 이벤트 중의 하나였다.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8등신의 늘씬한 미인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8등신이라는 미의 기준은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기준을 제공한 것은 그 유명한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다. 그리스 남쪽 에게해 밀로섬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발견한 대리석상을 이 섬에 정박하던 프랑스 해군이 본국으로 가져오면서 국보가 된 조각이다. (20) 비너스상의 역설
이 작품을 보면 비너스의 머리가 신체의 8분의 1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면 이 작품은 그리스 사람의 신체 표준을 반영해 조각한 것일까. 아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의 신체 표준은 7등신이었다고 한다. 머리가 신장의 7분의 1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전기 대표적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는 자신의 모든 조각 작품을 7등신으로 만들었다. 그 유명한 ‘창을 들고 가는 남자’ 역시 7등신이다.
밀로의 비너스(기원전 150년경).
이런 가운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BC 336~323)의 궁정에서 활약했던 리시포스는 고전기의 7등신 대신 8등신이라는 새로운 신체 비례를 제시한다. 그가 제작한 8등신상은 얼굴을 상대적으로 작게 하고 신체를 길고 가늘게 묘사해 우아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정치적 격변과 잇따른 전쟁에 따른 불안한 심리가 이런 과장된 미에 대한 선호현상을 부채질했다고 본다.
리시포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로마의 비너스)’를 보면 ‘창을 들고 가는 남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체 비례가 바뀌었다.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로마의 정치가인 플리니우스(AD 23~79)가 쓴 박물지에는 이 조각상의 제작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온다.
코스인들이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프락시텔레스에게 아프로디테상을 주문했는데 프락시텔레스는 옷을 걸친 비너스와 누드의 비너스상을 함께 제작했다고 한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던 코스인들은 누드의 비너스상을 보고 손사래를 쳤고 서슴없이 옷을 걸친 ‘정숙한’ 모습의 비너스상을 가져갔다고 한다. 크니도스인들은 할 수 없이 누드의 비너스상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의외의 반전이 일어난다. 개방적인 성향의 크니도스인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기 위해 도시 중심에 원형의 신전을 만들었는데 그 누드상의 아름다움이 입소문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크니도스의 명물이 된 것이다. 그리스는 물론 이웃 나라의 남성들이 저마다 이 상을 구경하기 위해 크니도스로 몰려들었다. 코스인들이 땅을 쳤지만 때는 늦었다.
이 일화는 당대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얘기해준다. 전쟁이 빈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도덕은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한편에선 구원을 갈망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욕망을 무분별하게 발산한다. 프락시텔레스가 누드의 비너스상을 만든 것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놓고 그런 욕망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여성의 누드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아프로디테(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속내를 위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상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 청년이 ‘겁탈’을 기도했다는 내용이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전해올 정도일까.
관능적 자태를 자랑하는 밀로의 비너스도 신성성보다는 관능적 묘사를 중시하는 ‘크니도스의 비너스’ 전통을 이은 것이다. 하반신을 옷으로 가리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허리에 걸린 옷자락은 보는 이의 성적 호기심을 극대화한다. 결국 8등신이라는 여성 신체미의 기준은 불안한 시대 배경 속에서 나온 인간적 욕망의 산물인 셈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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