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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미술산책 오그라든 발이 고뇌의 표현?…신체 통해 심리 묘사한 혁신자

눌재 2013. 12. 14. 09:51

오그라든 발이 고뇌의 표현?…신체 통해 심리 묘사한 혁신자

입력
2013-12-06 20:32:07
수정
2013-12-07 03:22:41
지면정보
2013-12-07 A19면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24) 로댕과 조각의 혁신
한 남자가 턱을 받치고 생각에 잠겨 있다. 벌거벗은 몸은 마치 운동선수의 그것처럼 단단한 근육질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사색하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몸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온몸의 근육은 초긴장 상태다. 특히 바위에 디딘 열 개의 발가락은 바짝 오그리고 있어 마치 공포에 질린 듯하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1879~1889)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1879~1889)


프랑스의 근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지적 사색의 상징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네 학교 교정에서도 모조품으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이 조각상은 인류구원 같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에 나선 필생의 역작 ‘지옥의 문’의 일부로 계획됐지만 지옥의 문이 미완성으로 남는 바람에 지금은 독립된 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벌거벗은 남자는 원래 지옥문 위에 앉아 그 아래 지옥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긴 인물로 설정됐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단테라고 주장하지만 신곡에서 단테는 옷을 걸친 모습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속단하기 어렵다. 제목도 원래는 ‘시인’이었는데 주물을 뜨던 로댕 공방의 장인들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여겨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명칭으로 불리게 됐다.

이 작품의 진가는 종전의 조각 개념을 뒤흔들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신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리스 조각은 물론 장식적이고 역동적인 바로크 조각에서도 벗어나 모델의 개인성과 육체의 견고한 구조를 표현하려 했다. 특히 표면의 질감,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려 했다.

이 점은 ‘생각하는 사람’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가 “나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두뇌, 주름진 이마, 벌렁거리는 콧구멍, 굳게 다문 입술을 통해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의 근육, 등과 다리, 꽉 쥔 주먹과 오그린 발가락을 통해서도 생각한다”고 했듯이 그는 인간의 심리를 신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로댕의 이런 생각은 그가 기법을 연마한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규 미술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는 엄격한 아카데미의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의 예술세계 방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명작을 목격한 로댕은 특히 그리스 조각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크게 감명받았다. 이 점은 “아카데미의 규범에서 나를 해방시킨 것은 미켈란젤로”라고 단언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런 의도는 1884년 작인 ‘칼레의 시민’에서도 뚜렷하다. 1374년 영국왕 에드워드가 이끄는 군대가 칼레를 침공했을 때 완강히 저항하던 시민 지도자 6명이 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노라고 대표로 나서는 광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그들의 숭고한 기상을 묘사하기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착잡한 심리를 그들의 위축된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인체 조각에 영웅적인 기상, 신화적 종교적 경건성을 심으려 했던 기존 조각의 전통에서 탈피해 조각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로댕과 현대조각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기에는 2% 부족하다. 로댕은 한 번도 사실적 재현의 전통을 부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사학자들은 그를 고전주의적 조각 전통의 혁신자로 볼 뿐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면 대체 현대조각의 직접적인 출발점은 누굴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현대조각가는 자신들의 뿌리를 세잔이나 피카소 같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에게서 찾는다. 브랑쿠시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리라.

정석범 문화전문기자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