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및 독서▶/시,수필 산책

11월에 머물러...

눌재상주사랑 2008. 12. 10. 01:06

   

 

11월에 머물러


 내가 아끼는 건 한 해 계절의 끝이랄 수 있는 11월에 즈음한 가을이다. 요사이 며칠 이 가을이 막 지려하고 있다. 이 무렵의 가을을 아끼는 마음은 아마도 어디를 가던 지천으로 널려있는 물든 단풍이나, 노오란 은행나무들이 서있는 거리가 사생화처럼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계절이 깊어지면서 도로 양편에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노오란 잎들을 떨어내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나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어느 덧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빠져들게 되고, 그 주변을 분주히 오가는 무표정한 사람들은, 어디론가 길 떠나는 채비를 서두르는 듯이 보인다.

이즈음 뇌리에서는 어느덧 계절의 표정을 따라 정감이 모닥불처럼 일어난다. 행인들의 발길이 끊어진 새벽녘을 기다려 나목이 되어가는 그 은행나무 살갗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부질없는 상념의 대화라도 나누며 밤을 이 나무와 함께 보내고 싶어진다.


 벗은 몸을 하고서, 얼마나 회한을 삭히고 삭혔으면 행인들의 따가운 눈길도 도외시 한 채 이렇게 처연한 모습으로 계절을 마감하려 하는 것인가? 이 나무들도  한 시절 성장과 영화를 누리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새싹으로 움을 틔워서 가지마다 무성한 신록으로 온 세상을 물들이다 가을에는 열매를 맺어 수확하는 일로써.......

하지만 지상의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이 영고 성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이제껏 갈무리해 온 지난일들은 한 시절 머물지 않기에 심지어는 자신마져도 보전하지 못하고 무심히 시절이 질무렵이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서 이렇게 동면에 들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무슨 의미인가.. 피조물은 이로서 무상에 든다.


 아! 무상 무릇 생명체라면 변하지 아니 함이 없이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야하는 순명을 쫓아, 맞아 다가올 그 순간에 머물면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상들도 이 변화하는 순간에는 한낱 티끌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마저도 잊고 ... ...그저 무상에 젖다.


 이 무렵 거리에는 해마다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들은 빛깔을 지워간다. 조금씩 채색이 지는 모습은 비로소 계절의 정점을 향해 치닫게되고, 이렇게 올해 가을도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려 채비 하고 있다. 이맘때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의 혹독한 기운을 담아서는 지는 계절과 더불어 긴 여정에 동반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햇살, 이들이 머물던 숲과 들판 아니 이 도회의 빌딩 사이에서라도 그곳이 어디이든간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좋은 시절은 동고동락을 하지만 이처럼 지는 계절 앞에서는 서로가 이별을 고하거나 묵시로 일관 할 뿐 간섭하지 아니한다. 그대로 자연의 법리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서로 간에 말없이 주고받는 눈빛을 대하자면 그들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습관처럼 지천명의 나이마져도 잊고서 순례하는 영혼이라도 된 양, 한낱 지는 은행닢에 동화되어 이렇게 계절 끝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어린 시절 시냇가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며 놀던 때가 떠오른다. 숨을 크게 들이 쉬고는 물속에 잠겨 얼마간 자맥질해 나아가다 후~하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멱을 감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동안 물속에 잠겨서 떠가던 순간! 봄부터 가을까지 살림을 꾸려온 은행나무의 한해살이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아직 동면에도 들지 아니한 가로수 코앞에서 성급히 겨울이 끝나고 봄날에  소생할 부활을 미리 상상해본다. 상념의 늪에 빠진 혼을 일깨워서, 만물이 눈을 떠는 봄날을 그리며 그 무언가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지난 시절 멱을 감던 초동이 물속을 떠다니다가 숨이 차올라 못견딜 순간에 “후~”하고 고개를 내밀던 일을 주마등처럼 떠올린다. 봄을 맞아 소생하는 부활과 내 어릴적 즐기던 자맥질이 닮아있다.

생도 또한 이 잠시동안 물속에서 자맥질하는 일순간에 불과한것인가. 


 주머니속에서 살며시 쥐어보던 손마디 마디에 이윽고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며 긴장의 끈이 풀어진다. 흐느끼는 빗소리에 기대어 무너지듯 그렇게 내 안으로 허물어져 내리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서, 길 위에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본다. 한 해가  지는 녘의 가을은 만물이 우수에 잠긴다. 그런때는 얹제나 슬픈 감정으로 마음을 적신다. 혹 시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다면 나는 시어를 적어나가며 깨알같은 글씨로 밤새워 노트를 채워나갈 것이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기운이 차다. 그 냉기가 한 낮의 햇살만큼이나 내밀하게 다가오지만 도대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경험해야 할 생과 그 생의 순환의 끝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한 닢 지는 잎새처럼 방황하는 내게 더불어 묻어오는 가을이 그래서 더욱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리라. 아마 이즈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