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美]
"꽃의 밀림에서 살아남아라" 이단아의 붓끝엔 애절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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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돌아와서 나는 화단하고 아무 관계없이 보이는 대로 꽃이 피면 꽃을 그렸죠.그때 꽃을 그린 것을 두고 화단에선 타락한 작가로,미술계에선 타락한 삼류 혹은 사류 작가로 취급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봄에는 할미꽃,개나리 등을 열심히 그렸어요. "(김종학 화백)
'설악산 화가' 김종학 화백(72)은 1980년대 말 자신이 한때 몇몇 동료화가들이나 비평가들로부터 '타락한 화가'로 취급 받았다고 회고했다. 물론 한국 현대미술에서 꽃이나 자연이 낙후된 소재는 아니다. 그동안 자연에 숨겨진 소위 생명력을 탐구하려는 노력은 한국 미술의 중요한 테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화단에서 김 화백의 그림이 진보적인 아방가르드의 소명을 지켜내지 못한 소위 '타락'한 화풍으로 여겨진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꽃 그림이 전통적인 풍경화나 정물화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원래 1979년 설악산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김 화백의 화풍은 전후 세대 추상화가들에 견줄 만했다. 그는 1961년 유네스코 세계청년화가 파리 대회에 박서보,하인두,정상화,김봉태씨와 함께 참여할 정도로 꽤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화가였다. 하지만 그가 파리,뉴욕,그리고 설악산 등지를 돌며 '내공'을 쌓아 1980년에 발표한 새로운 화풍은 이전까지 본인의 예술적 실험이나 당시 한국 화단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표현주의 기법을 풍경화나 정물화에 접목시킨 그의 화풍은 1980년대 주도적이었던 추상 계열의 한국식 미니멀리즘이나 구상 계열의 민중 미술,그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김 화백이 즐겨 그리는 일년생 꽃들의 경우 생물이 태어나서 자라나고 이내 시들어가는 과정을 빠른 주기로 보여준다. 소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에 놓여 있는 꽃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김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꽃이 자라나는 과정에 비유한다. 작가에게 자연은 과거와 미래,오래된 것과 새로 태어날 것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구도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소재였다. 특히 그의 2008년작 '설악산 풍경'에서는 꽃이라는 소재,그림을 그리는 방식,그리고 작가의 미학적 태도가 일관되게 드러난다. 얼기설기 줄기가 엮여 있는 엉겅퀴와 꽃들의 모습은 모든 식물이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대지의 각종 영양분과 태양의 빛을 향해 한껏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특정한 꽃을 소재로 잡기보다는 화면을 꽃들로 빼곡히 채운다. 소위 나무들의 밀림과 같이 꽃들의 밀림이 재현된다. 그리고 그는 각각의 꽃들보다는 엮여 있는 꽃들의 집합체가 만들어 내는 어수선한 상태를 강조한다. 따라서 꽃의 강렬한 색상은 보는 이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자연의 섭리를 인식시켜 주기도 한다.
화면의 꽃 이미지들은 작가가 화폭 위에 덧붙인 것이 아니라 바탕의 어두운 색상을 헤치고 생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홍 벚꽃들이 만연한 또 다른 '설악산 풍경' 역시 짙은 붉은색을 선택했고,밝은 분홍색과 흰색은 흡사 혼돈된 붉은 대기에서 점차로 모습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두텁게 발라진 밝은 분홍색과 흰색은 화면을 그득 메운다. 그리고 만발한 벚꽃의 모습은 벚꽃이 지기 직전의 마지막 화려한 모습에 해당한다.
김 화백의 '설악산 풍경'시리즈는 결국 시간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다루어온 사계절의 개념을 소위 현대적으로 해석해냈다. 하지만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주로 각 식물이 담고 있는 도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강조되었다면 김 화백의 작업에서는 일종의 삶에 대한 회환,투쟁,죽음의 메시지들이 강조돼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화가를 생사를 건 결투를 마치고 온 신들린 사람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주제들은 자신의 투박한 붓자국들과는 대조적으로 잘 계산된 색상의 대비를 통해 표현된다. 초승달을 묘사한 또 다른 작품 '설악산 풍경'은 검은 바탕 대신 바탕의 붉은 색상과 진한 푸른 색상이 절묘하게 교합된 색상을 사용했다. 한결 붉은 색상과 푸른 색상 간 대비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하늘색의 초승달을 나무줄기 사이에 걸쳐 재현하고 있다. 강렬한 색상의 배합은 전통적인 우리 고 미술이나 서구의 형식주의와도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작가가 주장하는 끝없는 극복과 투쟁의 미학은 그의 작업을 특정한 진보나 보수,혹은 서구나 전통 미술과의 단순한 연결고리에서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다.
(미술비평가 고동연)
입력: 2009-06-12 17:27 / 수정: 2009-06-1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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