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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一思 석용진) 무르익은 흔적 '검은 입술'…그마저도 아치형 곡선이다
여름이 타고 남은 가을이라서 그럴까. 그 하늘이 이동주의 싯귀처럼 저렇게 "하늘은/ 바래널린 빨래터라// 희다 못해 푸른 옥양목의/ 아슬한 슬픔('꽃샘'부분)"같이 마음을 그 어떤 무엇으로 무척 아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황홀해지는 가을. 오세영도 '후회'에서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후회'부분)"라며 후회 없이 떠나가는 가을의 황홀에 절규했다. 가야산 해인사 밝달가마로 가는 길에도 황홀했다. 홍류계곡을 일삼아 싱그러웠던 지난여름의 끝자락과 만발한 코스모스가 한데 어울려 황홀은 더 묘했다. 절을 살짝 비켜 곧장 마장마을로 치고 들면 어느덧 해발 700m는 더 됨직한 높이. 마장마을. 한 때는 살 찐 말들이 어진 주인들을 기다렸을 그 마을. 어느 해 가을인들 천고마비(天高馬肥) 아니었으랴. 질펀한 엉덩이를 흔들며 달렸을 그 기상이 옥 물 들인 하늘과 딱 제격이었을 텐데. 네 발이 모두 희다는 계복(啓服)이며 조련 받지 않은 준마 걸오(桀鰲)도 있는 힘 다해 뛰었을 게다. 청이마, 적다마, 돈점박이, 추마, 백마, 유미마, 오추마도 함께 어울렸을까. 마장마을서 초막골로 접어들면 코스모스는 더 현란한 색이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이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한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어/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이형기의 '코스모스'전문) 어지간히 왔다 싶은데 '밝달가마'라는 자그마한 화살표 표지가 용케도 눈에 든다. 하늘이 넓어서 일까 표지판이 너무 작게 보인다. 실은 작기도 작다. 그리고는 이내 밝달가마다. 주인 여상명씨. 갓 50대다. 머리를 밀어 버려 어느 암자 주지라 해도 곧이들을 수밖에. 수염만 없다면. 어울린다. 성씨가 박씨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너털웃음이 맑고 밝다. 눈빛은 응당 이런 산중에 가마 불 지피며 살기에 그런가 싶었지만 그 이상이다. 차림도 참 자유롭고. "꿈꾸는 자유 말고 다른 어떤 심리적 자유가 우리에게 있는가?"하고 '유년시절을 향한 몽상'에서 되물은 바슐라르처럼 그도 되묻고 있었다. '있다'면 어쩔 테고 '없다'고 한들 어쩔 텐가. 저 가마에서 빚어지는 그릇이 말할 테니. 그러고 보니 살림방과 바짝 붙은 너구리가마가 가야산을 요로 깔아 편안하게도 누워있다. 아름다운 곡선 봉우리를 셋이나 거느리고서. 아궁이는 그간의 그을음을 루즈 삼아 이뿌고. 검은 입술. 그마저 아치형 곡선이다. 억센 불김을 마중한 흔적이 검지만 그만큼 적나라하다. 손수 만들었다. 너구리가마는 등요(登窯)로도 불리는 장작가마. 좀체 보기도 힘들다. 기껏 가스나 전기, 기름가마가 고작이질 않는가. 그리 크진 않지만 아담하다. 입산한지 20여년. 여씨는 이 가마, 밝달가마서 발 물레질로 만든 찻사발을 구웠다. 물론 찻단지나 주전자, 찻잔도 많이 구웠다. 그래도 그가 늘 꿈꾸는 차그릇은 역시 찻사발이다. 불맛이 매섭도록 스미고, 무르익고, 변화하고. 그러다 꿈같은 찻사발이 나오면. 가야산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긴장하다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자유, '그것은 고향의 흙덩이처럼 귀중'하다고 '국왕'에서 노래한 그리그의 말처럼 비로소 그도 흙에서 고향을 느낀다고 했다. 순수다. 그가 구운 찻사발을 내 온다. 이라보 찻사발도 몇 있지만 역시 순백의 우리 찻사발에 눈길이 간다. 조선 막사발 같기도 하다. 가운데 곡선 진 찻사발은 힘이 있어 보인다. 양손을 댄다. 표면으로부터 전달되는 그릇의 감미. 손바닥은 알맞게 굽은 곡선에 닿자 알 수 없는 전율이 스친다. 순간이다. 그리고는 이내 참 좋은 그릇이구나 라며 중얼거리고는, 작가의 눈빛이 느껴지고, 민머리도 느껴진다. 너털웃음도 그릇의 안쪽 빈 공간에서 곡선 진 표면을 따라 흐른다. 웃음만 있고 소리는 그러나 없다. 그러다 어느 시점. 별다른 느낌이 필요 없어진다. 그저 찻사발만 어루만지고 있다. 한참을. 그리고는 다시 참 좋은 사발이다고 중얼거린다. 그런 후는 그저 스스로 뭉클해질 뿐. 얼마전 쿄또의 도자기 전문가가 우연히 대전의 한 전시장에서 자신의 찻사발을 보고는 어떻게 이 곳 까지 왔단다. 보나마나 겉으로는 태연했겠지만 속으로는 환장을 했을 거다. 대번에 전시계획을 잡았다. 오는 11월. 유명한 쿄또의 노무라미술관이다. 겨우 두어 달 남았지만 그 역시 태연하다. 속으로는 환장하겠지만. 전시를 위해 곧 밝달가마에 불을 지핀다고 했다. 그러면서 숱한 실패를 거듭한 지난날을 잠시 더듬는다. 실패야 병가지상사 아닌가. 그러나 "한 번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 하지 말라"든 피제랄드의 말처럼 그는 영원한 실패를 선택하진 않았다. 다행이다. 그렇다고 한 번만 실패한 것도 아니다. 여러 번이었지만 영원하지 않았다는 게 행운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다. 경북대 경영학과를 마쳤다. 처음부터 도자기를 구운 것도 아니다. 몇 해 동안 도자기 장사를 했다. 재미 봤을 리 없다. 그러고도 오늘 밝달가마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다. 쇼펜하우워도 "우주의 근저가 의지인 이상 인생을 지배하는 것 또한 의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듯이 그는 지금 그의 의지로 그의 인생을 찻사발로 지배하고 있는듯하다. 그는 찻사발 때문에 화개에 차밭도 있다. 찻사발을 만드는 의지라면 차밭 또한 그러리라. 직접 차를 덖는다. 입속에서 달달달 단침이 돌아야 좋은 차라는 그는 그래서 그가 만드는 차를 '단침'이라 이름 지었다. 당뇨에 매우 좋다고 했다. 좋으니 좋다고 할뿐 다른 이유는 알도 못한다는 것이다. 장삿속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경험에 의해 안 사실이라는 것. 이 산중에서 저렇게 힘주며 이야기 하는 게 좀 허술해 보인다. 여전히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 어거지 다인들의 생떼를 겪어보지 못한 탓일까. 돌아오는 길.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맑다. 방금 만지작거렸던 백자 찻사발의 흔적이 여전히 손바닥을 간지린다. 곡선 지은 허리부분이며 빙그레 순하게 둘린 찻사발의 입술 언저리로 지금 쏟아지는 상큼한 가을 하늘이 담길까. 세상에 여지껏 없었던 하늘차다. 그렇다면 차취(茶趣)의 정수라는 그 색채와 향기와 풍미는 어떨까. 곡선일까 직선일까. 당연히 곡선이겠지! 곡선 진 찻사발은 힘이 있어 보인다/표면으로부터 전달되는 그릇의 감미/손바닥은 알맞게 굽은 곡선에 닿자 알 수 없는 전율이 스친다/순간이다/그리고는 이내 작가의 눈빛이 느껴진다/너털웃음도 그릇의 안쪽 빈 공간에서 곡선 진 표면을 따라 흐른다/그러다 어느시점/별다른 느낌이 필요없어진다/그저 찻사발만 어루만지고 있다/ 한참을… 협찬:대구예술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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