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치 산등성이 타고 흐르듯 지어지는 다부진 자국, 저 유연한 곡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 늘 가윗날만 같으면. 걱정 없을까. 지금 나라꼴. 양편으로 갈라 '된다' '안 된다'만 노래한다. 충청도에서 급기야 애꿎은 전라도 경상도로 불똥이 튄다. 좁은 땅 쪼개고 또 쪼갠다. 쪼개는 소리. 나라 사랑하는 소리란다. 그 소리. 슬프다. 곱지도 않다. 듣지 않는 솜틀이 소리만 요란하다더니. 토인비는 "소리에 의해서 침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음에서는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느냐"며 반문하고는 그것은 침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 침묵. 입을 다물고 있으면 파리는 결코 들어 갈 수가 없지. 신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때. 그 시절에는 가배놀이라고 했다. 한가위 까지 한 달간 여인들은 두 패로 나눠 길쌈으로 내기를 한다. 진 쪽은 이긴 쪽을 풍성하고 융숭하게 대접한다. 음식과 술뿐이랴. 소리까지 대접한다. 한 여인이 슬며시 일어나 회소(會蘇) 회소(會蘇)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회소곡(會蘇曲)의 유래다. 그 노래 소리는 탄식조로 애처롭지만 우아하고 곱다. 지금 이 시각. 우리는 어느 쪽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그 노래가 회소곡일까. 어림없는 일. 눈부신 가을이 그저 아깝다. 내일, 바짝 다가 선 한가위. 고향으로 향한 발길들이 분주하다. 고향서는 송편 빚는 소리. 그 송편. 솔잎을 풍기는 솔 내. 그 내음을 입 안으로 머금으며 쫀득진 송편의 살들을 씹다보면 할머니 어머니들의 수고로움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모양을 낸 송편. 손가락 자국이 너무나 일정하고 정갈하며 선명하다. 참기름에 윤기 반들거리면 끝내 참을 수 없지. 덥석 한 입 물면 다시 풍기는 솔 내음. 천재시인 백석의 '고야(古夜)'가 생각난다. 이 시를 읽어보면 조금 전 시절의 명절들이 어떠했으며 그에 드는 송편의 이름과 소가 무엇이었던가를 짭짤하게 느낄 수 있다. "…내일 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쎄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팟소 설탕든 콩가루 소를 먹으며 설탕든 콩가루 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 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물으며 힌가루 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고야' 넷째 연). 우리의 사라져 버린 민속적 풍물들이 아련하다. 사투리가 많이 쓰였지만 별다른 흠이 없다. 울리는 그 노래 소리들이 결코 밉지도 않다. 오히려 신선하다. 도저히 이 시절에는 맛 볼 수 없는 정경 아닌가. 비록 부분이나마 이 시를 읽으면 더욱 송편이 씹는 맛 뿐 아니라 가슴에도 와 닿는 맛이 있음을 느낀다. 조개송편 등 위의 시에 등장하는 이름 외에도 송편은 많은 이름들을 갖고 있다. 지방마다 그 지방의 특색 있는 송편 이름들. 풍성한 보름달만큼 풍성하다. 경상도는 비교적 흰 송편에 모시송편이 대종을 이루지만 초승달 모양 갸름하게 빚은 꽃송편, 겹송편 하며 소에 따라 호박송편, 감자송편, 대추송편, 잣송편, 칡송편, 쑥송편, 송기송편, 도토리송편 등. 이름만 들어도 침이 꿀꺽인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소의 맛이 어울리면 송편의 맛은 어느덧 미미(美味)의 절정. 누군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방랑시인 김삿갓도 송편을 읊었다. "손안에 뱅뱅 돌아/ 새알이 되고/ 손가락이 주무르더니/ 조개 입술이 되다.// 그를 소반 위에 올리니/ 일천 뫼뿌리요/ 젓가락에 기워 들 제/ 허공에 반달이 떠오르다.(手裏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욕 金盤削立峯千疊 玉箸懸登月半輪)"(이응수의 '풍자시인 김삿갓' 중에서 인용한 '송편떡(松餠)'전문). 손안에 뱅뱅 돌고, 손가락이 주무른다는 표현. 여기에 아름다운 선이 진다. 모두가 곡선이다. 돌면서 만들고 주무르면서 탄생되는 곡선의 아름다움. 그 뿐인가. 조개 입술이며 허공에 떠 오른 반달은 또 얼마나 곡선미의 절정인가. 그런 송편, 곡선의 송편에서 우리는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의 힘이 느껴진다. 결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우리들 주위의 산맥들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는 힘이랄까. 기운이랄까. 다소곳하면서도 정연한 손가락 자국. 결코 허술하기는커녕 다부진 자국들은 마치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듯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며 생동하고 있다. 기운생동(氣韻生動) 하는 그림을 보는듯하다. 송나라 때의 미술평론가 곽사(郭思)가 그의 '화론(畵論)'에서 "기운이라는 것은 반드시 타고 나는 것으로, 인공적인 교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우리네의 송편에는 그런 기운(氣韻)이 넘친다. 일부러 시간만 투자한다고 해서 이룰 수는 없다.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되는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솜씨 덕분이다. 좋은 그림은 곽사의 주장대로 작가 개인의 전체적인 인격이나 인품이다. 그러하기에 '이치에 이르고 신의 경지에 들어선다(造理入神)'며 '아득히 의식함이 없어야 함(廻得無意)'을 그는 늘 강조했다. 우리의 송편도 그에 못하랴.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송편. 그림도 또한 그와 같기에 마음을 먹으면 손이 이에 응하고, 생각이 미치면 이루어지는 것이 송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어느 명가의 내림 손맛 못지않은 기운생동의 우리네 송편. 간혹 옆구리가 터질 때도 있지만 그건 생동하는 기운 때문이다. 요즘. 호기심 어린 아이들의 장난일수도 있지만 어머님이 만든, 할머님이 만든 송편에는 아무리 터져도 장난일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 터지면 터지는 대로 생동감이 묻어 더 감칠맛이다. 때 맞춰 영근 멥쌀의 그 탱탱한 알곡에서 여기 까지 오는 동안 겪은 엄청난 변화. 한가지 씩 단계를 밟으며 그 변화는 드디어 송편에 당도한다. 그의 길, 송편의 길. 이런 좋은 날 그 길을 생각해보라. 변화의 과정은 볼 수 없지만 송편으로 변화된 어머니, 할머니들의 손길. 주름지고 곡선 진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송편에 남아 있질 않는가.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우리의 저 생기 넘치는 산맥처럼. 그 산맥이 지닌 곡선처럼. |
/김채한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문학 및 독서▶ > 명문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재학의 시와 함께] 「서흥김씨 내간」/ 이동순 (0) | 2009.10.10 |
---|---|
[曲線美感 3부 (6) ]신천 (0) | 2009.10.10 |
[曲線美感] 3부·(3) 밝달가마의 자유 그리고 찻사발 (0) | 2009.09.26 |
[曲線美感 3부·(4)] 황금들녘 (0) | 2009.09.26 |
[옛 시조 들여다보기] 국화야 너는 어이 (0) | 2009.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