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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플렌스부르크獨 최북단 아담한 어촌… 고풍

눌재 2009. 10. 31. 14:27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플렌스부르크
獨 최북단 아담한 어촌…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 즐비
  • ◇플렌스부르크의 건물엔 대부분 건립 연도가 적혀 있어 걸음 멈추고 그 건물이 살아온 시간을 가늠해 보게 된다.
    독일 최북단 연방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도 맨 끝,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덴마크에 서게 되는 항구도시 플렌스부르크. 그곳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면 중세 어부들의 발걸음 위에 내 걸음이 스르르 얹히는 듯하다. 바다를 머금은 바람을 따라서 어부의 마을을 지나 목선이 정박한 항구를 지나 술집에 들러 하루의 피로를 풀자며 어부처럼 럼 한 잔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 어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함부르크에서 플렌스부르크로 가는 기차가 중간에 렌즈부르크라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200m쯤은 될 법한 높은 철교 위에 올라선 기차는 마을을 가운데에 두고 계속해서 나선형으로 돌고 돌았다. 킬(Kiel) 운하 때문에 강을 가로질러야만 하는데, 100여년 전에 만든 나선형 고가철교를 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렌즈버그 사람들이었다. 그 오래된 고가철교를 고속철도와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엔 철교에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을로 똥이 뚝뚝 떨어졌는데, 그때도 아무도 철교를 없애려고 하지 않았단다. 낙후된 농촌에서 도시로 나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고속철도의 유혹이 클 텐데도 그들은 철교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교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운하와 마을의 풍경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재빠른 도시의 삶에 지친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한 오후, 정말 작은 도시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여행객은 나뿐이었고, 기차역 앞은 한가롭고 바람은 가뿐했다. 천천히 발을 내디뎌 플렌스부르크의 안으로 들어서면서는, 중세 건물과 골목에 들어찬 여여한 공기가 내 걸음까지 여여하게 했다. 마치 오래된 한 권의 책 속으로 스며들 듯, 아끼는 책의 책장을 넘기듯 가만가만 걸음을 옮겼다.

    ◇글렌스부르크 호수 한가운데에는 덴마크 공주의 성이 어여쁘게 떠 있다.
    골목마다 호프(Hof)라고 불리는 작고 네모난 정원들이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집집의 문과 창문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꽃들로 사랑스럽고 고요했다. 나는 그 가운데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의 감촉과 냄새를 품은 책 같았다.

    ◇항구에 서면 혹고니들이 여여히 노닐고 플렌스부르크 전체가 잔잔한 바다에 투명하게 비친다.
    어느 집 창가엔 배 모양의 장식품들이 놓여 있고, 또 어느 집 커튼은 배와 갈매기가 있는 항구의 풍경이고, 또 어느 집 문엔 그물과 닻이 새겨져 있고…. 그런 집들이 언덕에 줄지어 있었다. 바다의 상황을 내려다보기 위해 예부터 어부들이 모여 살았다는 언덕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지우지 않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오자 항구에 닿았다. 잔잔한 바다엔 요트들이 정박해 있고 그 사이사이로 새하얀 혹고니들이 여여하게 노닐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고 저 멀리로는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그리고 항구 바로 앞의 자그마한 배 박물관과 럼 박물관은 어느 도시의 큰 박물관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섬세함과 쉼이 있어 오래도록 머물렀다. 조선소와 럼 양조장이 있는 플렌스부르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엔 신선한 생선 요리를 먹고 럼을 마셨다. 럼 향기와 바다 향기가 온몸에서 향긋하게 흘러다녔다. 일을 마치고 비늘을 털며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처럼 숙소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하루, 또 하루 이 작고 여여한 마을에서 살고 싶어질 것만 같다고. 그러다가 영원히 살아버릴지도 모르겠다고.

    플렌스부르크의 중심가는 ‘북문(Norder Tor)’에서부터 ‘북쪽 길(Norder Straβe)’을 지나 ‘큰 길(Grobe Straβe)’을 지나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남쪽 시장’,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빨간 길(Rote Straβe)’이라고 할 수 있다.

    # 벽에서 들려오는 옛이야기들

    북문에서부터 시작된 걸음은 곳곳의 오래된 정원들 때문에 곧잘 멈추었고,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땐 옛날 대중목욕탕을 만나기도 했다. 그곳은 벽에 목욕탕이라 이름이 새겨진 그 모습 그대로, 현재는 플렌스부르크 사람들이 공연을 하는 작은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바이올린 만들고 고치는 집’에서 만난 마에스트로 안토니오는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것만 같았다.
    ◇남쪽 시장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독일 내에서도 인정해 주는 맥주인 ‘플렌스부르크 맥주’를 마신다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처음 들어선 곳은 ‘마리엔 성당’이었다. 천장의 소박한 프레스코가 아름다운, 1284년에 지어진 성당. 그리고 또다시 몇 걸음 걸으면 1740년에 지어진 건물의, 럼을 파는 술집을 지나 작은 가게들을 지나 파이프오르간이 웅장한 ‘니콜라스 성당’에 닿았다. 그중에서도 또 눈에 뜨인 곳은 ‘남쪽 시장’ 바로 앞 길가의 약국이었다. 겉에서 보기엔 현대화된 약국이지만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니 곳곳 벽에 옛 벽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살려두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나는 옛 사람들의 자취 위에서 살아가는 플렌스부르크 사람들을 보면서, 내 인생에 부여하고픈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그길의 노란 은행잎처럼 생긴 집엔 ‘바이올린 만들고 고치는 집, 안토니오 멘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수제 바이올린을 만드는 마에스트로인 안토니오와 오래도록 바이올린과 플렌스부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바이올린도 사람처럼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마치 바이올린도 나이를 먹는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그 순간, 플렌스부르크의 수많은 벽 속에서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플렌스부르크 박물관’ 뒤에 있는 오래된 무덤들이 있는 공원을 오래도록 거닐었다. 묘비명의 이름 하나하나가 마치 언젠가 만난 적 있는 이들의 이름 같았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그곳의 벤치에 앉아 ‘플렌스부르크 맥주’를 마시며 붉어지는 햇살, 그리고 그들과 노닥거렸다.

    다른 곳으로 떠나려던 일정을 모두 뒤로 늦추고 나는 플렌스부르크에 일주일을 더 머물렀다. 그러고도 짐을 싸는 게 서운했는지, 떠나는 날 밤엔 기차를 놓치기도 했다.

    시인·여행작가

    〉〉여행 팁

    ■글렌스부르크=플렌스부르크와 맞붙어 있는 도시로, 마을 안의 자그마한 호수 가운데엔 덴마크 공주의 성이 어여쁘게 떠 있다. 말을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곧잘 만날 수 있는데, 아저씨들도 소녀들도 말을 타고 가다 인사를 나눈다. 마을 끝의 시원한 숲길은 고즈넉해서 느긋하게 산보하기에 좋다.
    ◇덴마크 뢰뫼 섬에서 연을 날려 바람을 보는 사람들.
    ■덴마크 뢰뫼 섬=플렌스부르크에서 금세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덴마크 스케르벡 지역의 뢰뫼 섬은 섬이라기보다 본토와 연결된 둑방 길이 있어 차로 들어갈 수 있는 모래 평원이다. 주말이면 윈드서핑을 즐기는 독일인과 덴마크인들이 캠핑카를 타고 모여드는데, 이곳에선 사람들이 모두 바람을 본다. 그들이 바람을 보는 방법은, 거대한 연을 날리고 그 연의 너울 같은 흐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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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9.10.22 (목) 17:15, 최종수정 2009.10.23 (금)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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