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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 쿨 게이트

눌재 2010. 1. 1. 21:08

[2010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 쿨 게이트
 
 
 
그림/권기철 화백
 
고유미 ▷1976년 대전 출생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위원 엄창석(소설가)
 
심사위원 김형경(소설가)
고유미

아이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간다. 출입문의 두 문짝이 둔탁하게 맞붙는 소리를 뒤로하고 분쇄된 얼음이 깔린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길은 팥빙수용 얼음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서걱거리기만 해서 눈길을 걷는 기분이 나지는 않는다. 사방에서 냉기가 쏟아진다. 노출된 살갗이 아릴 정도로 냉기가 파고든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바깥의 날씨와는 사뭇 다른 기운에 머리마저 얼얼해진다. 처음 아이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설 때는 온몸을 감싸는 서늘함이 상쾌하다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냉기에 가신 땀방울이 그대로 얼어붙는 느낌이다. 미리 이곳에 올 줄 알았으면 긴 소매의 외투나 긴 바지, 털모자와 귀마개 등을 준비했을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얼음굴이 있는 줄 알았다면 말이다.

얼음 기둥 옆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과 얼음 공룡의 등에 올라타서 깔깔대는 아이들은 모두 겨울용 외투를 걸치고 있다. 한낮이라서 그런지 어른보다는 단체 관람 온 아이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나는 한 아이의 빨간 털장갑을 바라보다가 양손을 엇갈려 겨드랑이 깊숙이 찔러 넣는다. 몸을 움츠리다 보니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코뿔소의 뿔 혹은 공룡의 이빨로 보이는 얼음 조각이 아이들의 발에 채여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외국의 유명 건축물을 본뜬 얼음 조형물과 얼음 숲, 얼음 동물원, 얼음 집, 얼음 놀이터를 지나쳐 아치형 얼음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특별 전시관이라고 씌어 있는 독립된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비교적 환한 조명 아래 얼음 조형물들이 반짝거리던 다른 공간과는 달리 좁고 어두컴컴하다. 한쪽 벽에 놓인 커다란 유리 상자에만 불빛이 모여 있다. 유리 상자 안에는 어린 소녀가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유리 상자 아래 소녀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 게 눈에 띈다. 소녀는 바로 내가 거리의 현수막에서 본 사진 속 주인공이다. 아이스 갤러리의 홍보 현수막에서는 인쇄가 잘 되지 않아 심하게 이지러진 모습이더니, 실제로는 얼굴이며 몸의 윤곽이 닥종이 인형처럼 정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소녀는 연일 강풍과 추위가 몰아치는 이국의 고산지대에서 발견된 미라이다. 미라라면 방부제로 보존 처리를 하여 뒤틀린 사지나 훼손된 얼굴 모습이 대부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녀는 너무나 말끔하고 평온한 모습이어서 유리벽 안에 얼굴을 바짝 대고 구석구석 살피게 된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은 가지런히 무릎에 얹은 채로 앉은잠을 자고 있다. 말 그대로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한 잠에 빠져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생생하여 언젠가는 슬며시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킬 것만 같다. 여러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 또한 탐스러운 흑발이다. 소녀가 입고 있는 갈색 드레스며 신고 있는 샌들, 솜털까지 보이는 얼굴이 오백 년 전 얼어 죽은 시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이빨이 딱딱 맞부딪친다. 나는 끌어내릴 것도 없는 반팔 티셔츠를 계속 잡아당긴다.

옥수수술을 마시고 잠이 든 채로 얼음구덩이에 매장된 것이라니, 어쩌면 소녀는 지금도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겁의 동면(凍眠)에 빠진 소녀를 깨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썩지도 녹지도 못한 채 혹한의 상자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녀. 문득 소녀가 꿈을 꾸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만약 꿈을 꾸고 있다면 영원히 결말이 나지 않고 지루하게 이어지거나 끝도 없이 반복되는 내용의 꿈일 것이다. 접착제로 꾹 붙여놓은 듯한 소녀의 눈꺼풀을 바라본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상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기념품이 담긴 아이스박스를 들고 갤러리 밖으로 나온다. 정수기가 있는 식음료 코너로 가서 냉수를 한 잔 들이켠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대기 의자에 앉는다. 출입문 앞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피해 우르르 문을 향해 달려가 사진을 찍고는 자기들끼리 돌려보며 시시덕거린다. 출입문의 모양은 유명 전자 회사의 양문형 냉장고와 똑같아 보인다. 털 코트를 입은 남자 아이가 다가와 출입문을 만져보고 여닫아보며 신기해한다. 그러더니 대기실 한쪽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여자와 함께 출입문 안으로 사라진다. 냉기가 훅 끼친다.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출입문 옆에 주의 사항을 적은 장난스런 메모까지 붙어 있다.

‘주의 요망, 출입 목적 외 빈번하게 여닫을 시 전력 소비량 급증’

아이스박스 안에는 반으로 축소된 얼음 소녀가 들어 있다. 정말로 얼음을 깎아 만든 얼음 소녀다. 크리스털이나 유리가 아닌 얼음 조각이 무언가를 기념하는 물건이 될 수 있을까? 언제든 물로 변할 수 있는 얼음 덩어리를 비싼 돈을 주고 기념품으로 사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더군다나 빠른 시간 안에 직접 그 자리에서 만들어 준 것이므로 얼음 소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도 아니다.

얼음 조각가 사내가 전기톱으로 얼음을 자르고 대칼, 소칼, 삼각칼을 분주하게 쥐었다 놓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순식간에 얼음을 쪼개고 부수고 갈아내는 손놀림만 눈으로 좇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결국 시간을 부리는 일이다. 얼음이 녹기 전에……. 사내가 무슨 말을 했냐는 듯 귓가에 한쪽 손을 갖다 대면서 하던 동작을 멈춘다. 나는 멋쩍게 웃는다.

냉장고 안이라면 내 발자국, 얼음 조각에 닿았던 온기, 얼음 조각을 하던 사내가 그대로 얼어붙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불현듯 십 년쯤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해진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백지를 펼쳐두고 연필 끝만 물어뜯는 것처럼 그 어떤 밑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다. 십 년 전, 열아홉 살에도 그랬다. 나는 얼음 덩어리가 뭉텅뭉텅 단칼에 잘려나가고, 얼음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정사각형의 흰 아이스박스를 가슴에 안고 걸어간다. 이래저래 불편하다. 나는 다시 아이스 갤러리로 들어가 끈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 그리고는 끈으로 아이스박스를 단단히 묶어 손잡이를 만든 후 그것을 들고 나온다. 그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서 미안하니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답 문자를 보내고 그녀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에서는 내 자취방으로 가는 것보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것이 훨씬 시간이 덜 걸린다. 사내는 얼음 소녀를 아이스박스 안에 담아 가면 두 시간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이라 말했지만, 얼른 냉장고에 넣어 둬야 더 이상 녹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나는 현관문 옆의 계단에 앉는다. 아이스박스는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땀이 밴 손바닥을 몇 번 바지에 문지르고 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언제쯤 그녀의 집 현관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손톱으로 아이스박스의 표면을 조금씩 뜯어낸다. 아이스박스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이 덩어리가 되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인다. 인공 눈송이들 같다. 나는 부스러기를 입으로 불어버린다. 쌀알만 한 부스러기 하나가 손등에 내려앉는다.

경찰들이 냉동 창고에서 꽁꽁 얼어붙은 엄마를 끌어낸다. 덧바른 시멘트의 거친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울퉁불퉁한 앞마당에 엄마를 내려놓는다. 서둘러 엄마에게 커다란 비닐 천을 씌우고 끈으로 마디마디 묶어버린다. 엄마를 이리저리 뒤치며 꺼내오느라 사람들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저녁 밥상을 차리는 엄마를 흘깃거리며 집을 나가 밤을 새우고 돌아온 참이다. 친구들과의 내기 당구에서 홀딱 잃어버린 돈과 끈적끈적한 한낮의 열기 때문에 풀이 죽어 집으로 들어선 나는 앞마당의 광경에 다리가 얼어버린다.

엄마가 뒤집어쓰고 있는 비닐에 물방울이 맺힌다. 바닥으로 퍼석얼음이 떨어지자마자 물로 변한다. 취기가 도는 것처럼 바닥과 하늘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나는 식칼을 가져와 사람들이 주변에 오지 못하도록 위협하며 접근금지띠를 들추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비닐 천을 찢는다. 엄마는 고개를 비딱하게 뒤로 젖힌 채 양팔을 늘어뜨리고 다리를 쭉 뻗은 모양으로 굳어 있다. 시름도 희망도 모두 떡하니 내려놓은 자세이다. 오히려 추위에 질겁한 모습으로 몸을 웅숭그리고 있지 않은 것이 내 가슴을 얼얼하게 한다.

오슬오슬 추워진다. 흔들어 깨우면 몸에 붙은 성에를 털고 부스스 일어날 것이다, 병원에 가면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듯한 엄마를 보며 중얼거린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내 허리를 잡고 팔을 뒤로 꺾는다. 나는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른다. 칼끝이 누군가의 팔뚝을 긋고 얼굴을 스친다. 버둥거리는 내 발에 채여 엄마가 옆으로 쓰러진다. 쿵, 엄마의 몸이 땅에 닿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그 소리와 함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엄마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내 죽으면 꽁꽁 얼려라. 똑똑한 박사들이 나중에 꺼내서 낫궈줄 수도 있잖냐.

뼈마디가 시리고 쑤신다며 스프레이 파스를 뿌릴 때마다 던지던 엄마의 농담이 귓가에 박힌다.

죽기 전에 얼려야지. 숨이 끊어진 다음에는 소용없잖아.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내 목소리가 들린다. 사십 대 초반의 나이에도 잔주름이 덮어 쪼그라져가던 얼굴이 눈앞에 맴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냉동식품 납품 공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엄마, 보탬 하나 못 되고 속만 썩이는 아들 때문에 찬 얼음을 만지면서도 부글부글 속을 끓였을 엄마다.

나는 삽을 들고 와서 냉동 창고 문짝의 고장 난 손잡이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입술이 새파래지고 오한이 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린다. 그 누구도 언잠에 빠진 엄마를 깨울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내 손에 들린 아이스박스를 보고서 그녀는 내가 수산시장에 다녀온 줄 알았나 보다. 들어서자마자 웬 생선이냐며, 오랜만의 술자리를 상상하는 눈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냉장고로 다가간다. 주방에서 곰국 끊이는 냄새가 진동한다.

- 냉장고 바꿨어요?

아이스 갤러리의 출입문과 비슷한 문양의 핑크색 냉장고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묻는다. 전에 있던 회색 계통의 양문형 냉장고보다 훨씬 크고 값이 나가 보인다.

- 응, 얼마 전에. 무슨 냉장고가 냉장실과 냉동실이 뒤바뀌어가지고는, 냉기가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통 쓸 수가 있어야지. 지난번 이 일대 정전 사고가 났었는데, 그 이후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칸칸이 독립 냉각이 가능한 것으로 바꿨지. 어딘가 열어보면 아직 떼지 않은 라벨도 있을 거야. 완전히 새 냉장고거든.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냉장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곰국 솥에서 기름을 걷어내는 틈틈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높인다. 이럴 때 보면 그녀는 새 가전제품이나 화장품을 구입해서 두고두고 우쭐대는 아줌마가 맞다. 그녀는 나보다 아홉 살이 많다. 동안이 유행인 요즘, 그녀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적고 탱탱해 보인다. 그런데도 흰머리가 많아서인지 제 나이보다 더 보태는 사람이 많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슬로 푸드 마니아에다가 혼자 사는 그녀에게 크고 기능 좋은 냉장고가 필요할까 싶다. 그러나 그녀는 김치나 두부뿐만 아니라 장아찌,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도 몽땅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어야 곰삭은 맛을 묶어둘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오래 숙성된 발효, 저장식품도 스톱해야 할 때가 있다는, 한없이 묵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식품 보관법이다.

냉동실을 열어 칸막이 선반 두 개를 빼고 아이스박스를 넣는다.

- 얼려둘 음식이 그렇게 없어요?

나는 아이스박스만 덩그러니 자리 잡은 냉동실을 열어 둔 채 그녀에게 묻는다.

- 아니, 냉장고 구경하러 왔니? 오랜만에 만나서 웬 뚱딴지같은 질문이야. 더우면 에어컨 틀어줄게.

그녀가 언짢은 듯 입을 비죽거리다가 웃어넘긴다. 시골에서 동생들이 잠깐 다녀간다고 한 얘기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덜컥 약속을 잡았다며, 미안해한다.

- 내용물이 뭔데, 풀지도 않고서 쑤셔 넣어?

그녀가 아이스박스를 꺼내어 뚜껑을 열어본다. 곰국이 묻은 미끄러운 손으로 얼음 소녀를 집어 올리다 떨어뜨릴 뻔한다. 그녀의 집까지 오는 사이 조금 녹았는지 얼음 소녀의 몸이 더 투명해져 있다.

- 얼음 덩어리네?

- 얼음 소녀예요.

- 뭐라고?

- 선물이에요. 그런데 손대지는 마세요.

- 왜?

- ……차갑잖아요.

녹아버리잖아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말을 바꾼다. 나는 그녀의 의문스런 표정을 외면하며 얼음 소녀를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냉동실에 넣는다. 소녀의 코가 눈에 거슬릴 만큼 납작해 보인다. 원래 그런 모습이었는지 녹거나 깎여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 밥이나 먹자.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내 손을 주방으로 이끈다. 어디에서 왜 가져온 얼음 조각인지 묻지 않는다. 내 행동이나 말에 개의치 않는, 그녀의 적당한 무심함이 편안하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호들갑 떨며 반가워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 만난 지 일 년이 넘도록 말을 놓지 못하는 내게 지청구 한 마디 않는 것도 그렇다.

그녀가 식탁에 곰국과 깍두기, 호박전, 홍어무침, 오징어젓갈 등을 차려놓고 나를 의자에 앉힌다. 언제부턴가 쉽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패스트푸드를 즐겨 찾게 된 나로서는 뽀얀 곰국이 올라온 저녁상이 그야말로 성대한 만찬이나 다름없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서, 그녀가 내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안 본 사이 그녀의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더 많아 보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뒤적이며 난감해하는 내 손길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한마디 던진다.

- 흰머리가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 이 정도면 새치 수준이 아니라니까. 자글자글 속 썩일 남편, 생떼 부리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나이가 이렇게 흰 머리로 덮일 만큼 지긋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속상해, 정말.

-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 고민? 새삼스럽게……. 내 유일한 고민이 이거잖아.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그리고는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괜스레 멋쩍어진 나는 서둘러 말을 돌린다.

- 원래 뽑으면 뽑을수록 같은 자리에 집요하게 다시 난다니까요.

- 그건 그래. 염색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좀 좋아. 알레르기 안 생기는 염색약 그런 거 없나.

- 숱 많은 은발도 멋지잖아요.

- 난 싫어. 준도 내 나이 되어 봐. 그런 말이 나오나. 난 싫다고. 백발마녀, 아니 백발미녀 되는 거.

입을 삐죽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나를 죽은 자기 남편의 이름으로 부른다. 나와 같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남편이 나를 닮았다거나 나를 보면 희한하게 남편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신파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든든한 방패막이로서 의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애인이 둘이나 있는 여자이다. 변변한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훤칠한 허우대의 미남자도 아닌 내가 그녀의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녀를 송 여사라고 부른다. 그녀가 김 여사인지 박 여사인지 장 여사인지 정확히 모를뿐더러 물어본 적도 없다. 그냥 엄마의 성을 붙여 송 여사라고 부른다. 물론 그녀에게 송 여사라고 호칭을 붙여 부를 일은 거의 없다.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 부르는 관계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 그녀와 나는, 그러니까 그녀 식대로 표현하자면 언제든 스톱할 수 있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색도화지 위에 그녀의 흰머리 몇 가닥이 얼크러져 있다. 흰머리를 따갑지 않게 뽑기 위해서는 털뿌리 부분을 조심스레 눌러 잡고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에 한번 휘감아 잡은 후 단번에 당겨야 한다. 어벌쩡하게 당기다가는 무척 따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흰머리 뽑아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만난 고객이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미인이라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틈나는 대로 흰 머리 뽑아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다. 원하는 사람은 거의 중년의 여자들이었고 더러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다.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아줌마들이 찾는 곳에 가면 말벗이나 심부름을 해 주고 밥을 얻어먹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집안의 전구를 갈아주거나 벽에 못을 박아주는 단순 작업을 하고 나서 덤을 받아오기도 했다. 으레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뽑아주기 마련인 흰머리조차도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뽑아야 하는 사람들은 흰머리 몇 개를 더 뽑는 것보다 함께 있어주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녀와의 만남은 늘 들쭉날쭉하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두 번이나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녀가 두피를 감싸 쥔다. 미안해하는 내게 농을 던진다.

- 세월의 뿌리를 뽑아내려 하는데, 아프지도 않으면 재미없지. 안 그래?

보이는 대로 한다면 한 주먹도 넘게 뽑아야 하지만, 그대로 둔다. 흰머리를 자꾸 뽑아내면 나중에는 탈모의 원인이 되기에 안 된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흰머리 뽑아주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지 오래인데, 특별히 선사하는 서비스라고 너스레도 떨어본다. 그녀의 머리에 베개를 괴어준다. 그녀가 베개를 밀어낸다. 다시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사타구니 쪽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몸이 오싹 움츠러든다. 나는 내 몸을 훑고 있는 한기를 눈치 챌까봐 그녀의 젖가슴을 힘껏 움켜쥔다.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나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닮은 그녀의 교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몸은 매끄럽고 따뜻하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코를 박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몽롱해진다. 한없이 녹아내리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하여 나는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다.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쇳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뀌자, 나는 격정과 두려움의 경계에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눈가가 촉촉하다. 순간, 그녀의 내밀한 뒷모습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내 몸은 더욱 뻣뻣하게 굳어진다. 나는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매번 그녀와의 만남을 끝내리라 생각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 번 이제 그녀를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서 베란다로 나온다.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는 하늘이 검붉은 보랏빛이다. 건물 여기저기서 네온사인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퇴장 시간이 지난 공원만이 어둠을 먼저 끌어다 덮고 있다. 현란한 불빛이 아파트 베란다 창에 닿아 번졌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실내이지만, 베란다 창을 활짝 연다. 하루 종일 이글거리던 태양이 사라진 후에도 달아오른 땅의 열기만은 식지 않고 있다. 아이스 갤러리의 아찔한 추위가 생각난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빼들고 나온다. 그녀는 알몸인 채로 손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고 있다. 바닥으로 그녀의 흰 머리카락이 천천히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탱탱한 피부를 보자 또다시 한기가 몰려온다. 눈을 질끈 감는 내게 그녀가 묻는다.

- 뭐라도 더 먹을래?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선서하듯 손바닥을 들어보이자 그녀가 씩 웃는다. 그녀는 웃을 때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입 꼬리를 한껏 올린다. 그러면 왼쪽 덧니의 끝이 빠끔히 튀어나오고, 입가의 근육이 밀려 양쪽에 초승달 모양의 살집을 만든다. 그것은 엄마의 미소를 닮아 있다. 송 여사인지 아닌지 모를 그녀에게 진짜 송 여사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묻지 않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쏟아낼 만한 주변머리가 없을뿐더러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피워보는 담배다. 요즘은 담뱃값도 감당하기 힘들어 거의 끊다시피 하고 있다. 금연을 약속하며 담배 개비를 부러뜨리듯 미련 없이 끊어버릴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기회가 생길 경우에만 몇 개비씩 태운다.

나는 여전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막노동과 피자 배달, 대리 운전, 중학교 야간 경비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는 있지만, 무엇 하나 확실치 않다. 웬만큼 하다 보면 들이밀 구멍이 생긴다는데, 그 웬만큼 하는 축에도 끼지 못하고 절절매니, 치열한 경쟁률을 뚫겠다는 배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깨끗하게 포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오기를 부려 그악스럽게 덤비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고랑만 파고 있다.

조각 얼음이라도 씹고 싶은 생각에 그녀의 냉장고로 간다. 아까 텅 빈 냉동실을 보았을 때 미리 얼려둘 것을 그랬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플라스틱 얼음 틀에 물을 부어 얼음 소녀의 머리 위 선반에 얹어둔다. 얼음 소녀는 구부러진 모습 그대로이다. 희끗희끗한 성에가 얼음 소녀의 몸피에 달라붙어 있다.

나는 그녀가 챙겨주는 과일을 먹고 주섬주섬 일어난다.

- 벌써 가려고?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

그녀가 접시에 남아 있던 복숭아 한 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한다.

- 그냥 가야겠어요.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 에어컨 바람 때문에 그런가 보다. 아플수록 누가 옆에 있어야지. 약 챙겨줄 테니까 자고 가면 되겠네.

- 아니에요. 아무래도 집이 낫죠.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분쇄기에 과일 껍데기를 집어넣고, 빈 통 몇 개를 챙겨서 냉장고 앞에 앉는다.

- 가만 있어보자, 오이 피클이랑 밑반찬 몇 가지 싸 줄게. 들고 가.

그녀는 냉장실 구석구석을 뒤져 반찬통에 이것저것 옮겨 담는다. 냉장고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다.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등이 생각보다 넓어 보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뽀얀 맨 허리가 살짝살짝 드러난다.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 나는 목울대가 아프도록 천천히, 깊게 침을 삼킨다.

어차피 먹지 않아 냉장고에서 썩어갈 운명이지만 나는 항상 그녀가 싸 주는 것들을 군말 없이 받아 온다. 그녀가 보자기 위에 반찬통을 차곡차곡 쌓는다. 보자기를 여며 묶으려다 말고 거실 서랍장에서 약봉지를 꺼내 맨 위에 올리고 마무리한다.

- 몸조심해야지. 그리고 다음에는 약속 꼭 지킬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어디 근사한 데 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내게 건네는 보자기가 묵직하다. 몸조심하라는 그녀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을 닫고 나온다. 그녀는 쿨한 여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거울을 보고 거듭 중얼거린다.

드문 일이지만, 그녀와 밖에서 만날 때는 주로 맛집을 찾아다녔다. 맛 기행 프로그램의 리포터처럼 그녀는 맛집을 꿰고 있었고, 나도 덩달아 계절별 보신 음식을 얻어먹기도 했다. 나와 헤어질 때 그녀가 하는 말은 어김없이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먹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했던가, 생각해보니 어김없이 ‘네’였다.

집으로 가는 길목의 놀이터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부스럭거리는 반가운 소리가 들릴 리 없다. 나는 입술만 계속 핥는다. 역시 그녀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보퉁이를 내려놓고 그네에 앉는다. 후텁지근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어지럽힌다.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가 가로등 불빛을 가려 그네가 있는 쪽은 어두컴컴하다. 옆 가로등의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철봉을 바라본다.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 시간이면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이 철봉이다. 2학년 때인가, 나는 철봉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 적이 있다. 한 쪽 다리를 철봉에 걸고 나머지 한 다리를 굴러 그 반동으로 철봉 위에 오르는 동작을 하다가 땅으로 나동그라졌다. 철봉 위로 우뚝 몸을 실어보지도 못하고 철봉을 놓치는 바람에 떨어진 것이다. 양호실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병원에 가서 상처를 꿰맸다. 한동안 학교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일이다. 그 이후로 철봉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철봉을 잡은 두 팔은 힘없이 떨렸다.

쇠기둥 두 개가 땅 속에 밑동을 박은 채, 수평으로 놓인 나머지 쇠막대의 양끝을 받치고 있는 철봉. 그 단순한 모양으로부터 풍기는 정연한 질서는 철봉 운동이 포함된 체육 시간이 있는 날에는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로 나를 옥죄었다. 당연히 철봉 실기시험을 볼 때마다 나는 최하 점수를 받았다. 필기든 실기든 딱히 최고 점수를 받은 시험이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 체력장에서는 철봉에 매달려 무릎을 오그려 붙이고 대롱대롱 버티다가 단 한 개의 턱걸이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한 번도 무언가를 딛고 올라선 적이 없는 나였다.

그네에 실린 몸을 앞뒤로 흔든다. 발을 뻗어 보퉁이를 툭툭 걷어찬다. 보퉁이가 옆으로 넘어진다.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놓은 철문들이 놀이터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진다. 시커먼 철문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도 한다. 손을 뻗어 두드리거나 손잡이를 비틀어 볼 틈을 주지 않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주먹으로 눈가를 꾹꾹 누른다.

철봉을 바라본다. 철봉의 모양이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통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문 혹은 길목 같기도 하다. 넘어진 보퉁이를 일으켜 세운다. 하늘색 보자기에 반찬 국물이 스며들어 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철봉 세 개가 연달아 있는 곳에서 가장 높은 철봉 앞에 선다. 내 키보다 조금 높다. 양팔을 벌리고 철봉 안을 왔다갔다 드나들어 본다. 아무것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다. 팔을 뻗어 철봉에 매달린다. 쇠붙이의 서늘함이 손바닥에 닿는다. 흔들흔들 바람에 몸을 맡긴다. 팔다리를 마구 흔들며 몸부림친다. 두 손에 힘을 주어 철봉을 움킨다.

자취방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길 때마다 안에서 걸린 걸쇠만 덜그럭거린다. 도무지 문을 열 수가 없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난감해하다가 건물 밖으로 나간다. 허름한 원룸 건물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어서 시멘트벽으로만 구분을 해 놓다 보니, 건물과 벽 사이에 마른 체구의 사람이 드나들 만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특히 내 방은 막다른 골목과 인접해 있어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도 뜸한 곳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가로등 불에 의지하여 1층 내 방의 창문이 나 있는 모퉁이로 돌아간다. 창문 앞에서 나는 멍하니 멈춰 서고 만다. 누군가 창살 몇 개의 아랫부분을 예리한 도구로 끊고서 안으로 들어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므로 외출 시에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탓이다. 아무것도 훔쳐갈 것이 없는, 좁고 지저분한 자취방이라는 안이함도 한몫을 했다. 침입자가 만들어 놓은 경로대로 창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다. 날카로운 창살에 긁혀 정강이와 팔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다.

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급한 손길로 끄집어냈을 옷이며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창살을 끊은 수고라도 보상받고 싶었을까? 몇 벌 없는 옷가지 중 그나마 값이 나가는 티셔츠 하나가 사라지고 없다. 텔레비전 위의 두루마리 화장지가 떨어져 현관문 앞까지 굴러가 있다. 운동화 자국이 몇 개 찍힌 마디를 피해 화장지를 뜯어낸다. 피가 새나오기 시작한 상처를 화장지로 덮고 꾹 누른다. 방을 원래대로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옷장과 책장, 잡동사니 보관 바구니에 대충 쑤셔 넣으면 그만이다. 구겨진 신문지와 겨울 점퍼를 옆으로 밀어놓고 자리를 만들어 앉는다.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자취방은 터를 잡아 눌러앉을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내 방에 있는 가전제품이나 살림살이는 모두 재활용센터와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헌것들이다. 주변 사람에게서 공짜로 얻은 것도 있다. 언젠가 버리고 새것을 장만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적당히 손때 묻고 헐거워진 것들로 가득한 자취방. 지금은 상호명과 로고가 바뀐 전자 회사의 냉장고, 아이엠에프 때 부도가 나서 더 이상 가구를 생산하지 않는 회사의 책상, 여러 자취집을 전전했던 낡은 밥솥. 도둑도 외면한 물건들이 한여름의 열기를 잠재울 만큼 싸늘해 보인다.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치밀지는 않는다. 귀중품이나 최신형 노트북, 현금 등을 집 안에 숨겨두고 지낼 형편이 못 되므로 억울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눈물이 솟아오르려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참는다.

방 안을 정리하다 말고 멍하니 쓰레기통을 바라본다. 책상 구석에 쌓아 놓은 행정학 요약 노트 세 권, 두꺼운 대학노트에 꼬박꼬박 손으로 써서 정리한 노트 묶음이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 낱장이 뜯어지고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노트를 꺼내본다. 조각난 낱장을 다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찢어져 있다. 그것은 다음 달에 치르게 될 시험을 위해 집중적으로 보려고 만들어 둔 요약집이다. 누군지 몰라도 참 잔인한 도둑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둑은 빈 집의 볼품없는 주인에 대한 통렬한 복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아끼는 금품을 잃어버리는 것도 끔찍한 일이겠지만, 시험을 코앞에 두고 중요한 자료를 잃어버리거나 자료가 훼손되는 것도 진저리가 날 일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기에 그렇다. 울컥 화가 치민다. 나는 조금이나마 정리했던 물건들을 다시 쏟아내고 헝클어놓는다. 방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아 버린다.

갈증이 난다. 냉장고를 열자마자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제때 끌어내지 못한 나머지 곰팡이가 생기고 흐물흐물하게 변해버린 어묵과 우유, 밑반찬을 골라낸다. 썩어버리기 전에 먹어 치웠어야 하는 것들이다. 빈 생수통만 굴러다니는 냉장고를 닫고 개수대로 가서 수돗물을 받아먹는다. 손으로 입을 훔치는데, 냉장고 밑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게 보인다. 나는 두꺼운 영어책을 골라 들고 바퀴벌레를 향해 내리친다. 책 밑을 들춰보려 할 무렵, 문자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책은 그대로 두고 메시지부터 확인한다.

잘 갔는지 궁금하네. 여긴 또 정전 사고가 나서 온통 깜깜. 언제 복구될지도 깜깜. 건물마다 핸드폰 불빛만 반짝거리니 재미있는 광경이라 문자 날린다. 약 먹고 푹 자라.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서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댄 채 문질러 본다. 잠시 후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는 도시의 한복판, 그녀의 어두운 냉장고 안에서 천천히 녹고 있을 얼음 소녀가 떠오른다. 그녀는 아마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것이다. 얼음 소녀가 물로 변해 냉장고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상상을 해 본다. 흘러나온 물, 아니 얼음 소녀가 그녀의 따뜻한 몸을 훑어 내리다가 내 가슴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잰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가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짝짝이 신발을 신고 나온 탓에 고꾸라지려는 몸을 세워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휘청거리다 길 옆 화단을 짚었던 손바닥이 흙으로 버스럭거린다. 손 안의 이물감을 뒤로한 채 주먹을 쥔다. 온 힘을 다해 뛰면서 눈을 꾹 감는다.

그녀의 냉장고를 열고 얼음 소녀를 꺼낸다.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 얼음 소녀는 한결 투명해져 있다. 얼음 소녀를 품에 안는다. 얼음 소녀의 차가운 몸피가 살갗에 달라붙자 머리끝이 곤두선다. 나는 힘껏 얼음 소녀를 끌어안는다. 얼음 소녀가 내 품에서 서서히 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발밑으로 따뜻한 물이 고인다. 상상의 끝에서 내 몸은 얼음 소녀와 하나가 된다. 나는 열기로 욱신거리는 가슴을 오랫동안 쓸어내린다.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본다. 불빛을 삼킨 그녀의 아파트가 저 멀리 모습을 감추고 있다. 나는 더욱 속도를 내어 발을 내딛는다.

(끝) 그림/권기철 화백

*[당선소감] "소박한 서해 일출처럼…쉼없이 작품 쓸터"

  서해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에 다녀왔다. 주변을 둘러싼 겨울나무의 황량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봄이 되면 헐벗은 가지에도 어김없이 새싹이 돋겠지만, 내 눈에는 그대로 얼어 죽거나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디로 향하든 짐을 꾸려야 했다.

  오랜 시간 칭얼거리고 절망하며 지냈다. 그럴수록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약한 심사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제자리걸음인 소설과 늘 뾰족해져 있는 일상, 앞이 보이지 않는 갑갑함 속에서 나는 걸핏하면 눈물을 훔쳤다.

  서쪽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은 일출과 일몰이 꼭 닮아있음을 깨닫게 해 준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곰보빵과 요구르트, 책받침을 공짜로 얻어 들고 신이 나서 잔디밭을 뛰어다니던 백일장 소녀를 떠올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원고지에 꿈을 적고 콧노래를 부르던 열한 살 무렵의 ‘초심’을 생각했다.

  영원히 백일장 소녀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설익은 소설로 동해의 찬란한 일출을 꿈꾸는 모난 조바심을 털어내야 했다. 소박한 서해의 일출을 바라보며 그저 쉼 없이 쓰겠노라 마음을 다잡고 돌아온 다음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도 부끄러워 몸이 비비꼬인다. 아직 부족한 소설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한번 달려 보지 않겠느냐, 손을 내밀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포기하지 않도록 어깨를 다독여준 이들이 많다. 어찌 그 고마움을 전할 수 있을까. 열심히 쓰겠다는 투박한 다짐으로 고마움과 면구스러움을 대신하고자 한다.  

  ‘불면의 연분홍’이라 불렀던 내 작은 노트북의 이름을 이제 ‘불멸의 연분홍’이라 바꾸고 힘을 내야겠다.

  동해에서든 서해에서든 해가 뜨는 순간만큼은 꿈인 듯 황홀하다.

※[심사평] '사회초년병의 심리' 개성적 통찰 돋보여

최종심에 올라온 11편의 작품은 그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다채로운 경향을 보여, 문학이 시류보다는 개성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선명히 증명해보였다. 모든 작품에서 오랜 문학적 연마의 흔적이 보였고, 그 노력에 상응하는 수준이 확보되어 있었다. 11편 중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고유미의 ‘쿨 게이트’, 위주옥의 ‘스포일러’, 이제곤의 ‘너의 소리’, 김엄지의 ‘몸에 좋은 소설’ 등 네 편이었다.

  ‘스포일러’는 극장 휴게소 한쪽에서 타로카드 점을 보는 직업을 가진 화자를 내세워 삶의 비의적이거나 불가항력적인 면을 이해하려 애쓰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인의 삶 뒷면만 나열하듯 들추어낼 뿐 정작 주인공의 삶에 대한 치열한 성찰은 결여되어 있어 플롯에 중심점이 없고, 주제가 모호해진 점이 아쉬웠다.

  ‘너의 소리’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래방 도우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말이 주는 상처와 침묵의 고귀함을 대비해 보이는 작품이다. 찬찬한 묘사와 단단한 구성은 일인칭 독백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을 잘 비켜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속임과 복수에 관한 흔한 이야기를 늘 듣던 방식으로 듣는 듯한 미진함이 있었다.

  ‘몸에 좋은 소설’은 원푸드 다이어트로 책을 뜯어먹다가 기어이 소설 쓰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한 젊은이가 소설가로 태어나는 심리적 과정을 발칙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문체로 서술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다만 패기가 지나치게 승해서 총체적으로 덜 여물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쿨 게이트’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아버지의 이름’에 복종해가는 사회 초년병의 통과의례를 그려낸 작품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인 주인공에게 사회는 쉽게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얼음 창고에서 동사한 어머니, 얼음 같은 연상의 연인, 얼음 조각의 소녀상을 세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 욕망을 넘어서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결국 연인을 만나고 온 날 자취방에 도둑이 들어 시험공부중이던 노트가 찢겨진 것을 발견한다. 진정한 성인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청춘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개성 있는 방식으로 통찰해낸 점이 미더웠다.

김형경(소설가) · 엄창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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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1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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