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제국 왜 허망하게 무너졌나
① 동물성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② 금은광만 넘쳤을 뿐 강철·총이 없었다
③ 문자 없어 소통 부재로 우물안 개구리
④ 폭정에 시달린 부족들 스페인 군대에 협력
② 금은광만 넘쳤을 뿐 강철·총이 없었다
③ 문자 없어 소통 부재로 우물안 개구리
④ 폭정에 시달린 부족들 스페인 군대에 협력
20100108003239
-
1532년 11월 16일,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68명의 스페인 군대는 남아메리카의 카하마르카에서 8만명의 잉카 군과 맞선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페인군은 잉카 원주민 7000여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다. 건국 90년 된 제국의 싹을 싹둑 잘라버리게 되는 스페인과 잉카의 첫 충돌, 16세기 두 나라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000만 인구를 거느린 잉카는 정말 168명밖에 안 되는 소수의 스페인군에 의해 멸망했는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잉카는 정말 저항조차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부족이었는가? 의문은 끝이 없다.
잉카 최후의 날/킴 매쿼리 지음/최유나 옮김/옥당/3만2000원
킴 매쿼리 지음/최유나 옮김/옥당/3만2000원
저자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잉카의 어린 황제가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스페인 병사들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거의 소탕할 뻔했었던 것, 아마존 밀림 속에 들어가 비밀의 도시 빌카밤바를 세운 뒤 그곳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며 36년 동안 치열한 게릴라전을 계속해나갔다는 것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페인군과 잉카군의 전투까지 새롭고 신선한 시각으로 전하고 있다.
여기에 황금에 대한 인간의 욕망, 비운의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신세계를 차지하기 위해 피사로 형제들과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벌이는 동지들 간의 싸움, 외부의 적보다 황위를 빼앗으려는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한 잉카의 황위 다툼 등 국가와 국가 간의 큰 전쟁 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팽팽한 갈등관계까지, 감춰졌던 역사와 인물을 상세하게 복원해냈다.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로 간 까닭은 순전히 황금 때문이다. 잉카의 불운은 그들이 갖고 있던 황금과 은이 우연히도 16세기 유럽의 통화 단위와 똑같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선원들의 1년 평균 임◇잉카 시대 군주묘에서 발견된 벌거벗고 찌푸린 표정의 음흉한 신 펠리노 신상.
구두 수선공, 재단사, 선원, 대장장이, 목수, 상인 등 당시 스페인의 낮은 신분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에게 잉카 원정은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다. 기마대 대위였던 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하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사로는 장남이었지만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소유지도 물려받지 못했다. 출생의 상처와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은 그의 발걸음을 필연적으로 신대륙으로 향하게 했다.
탐험가로부터 잉카 제국 이야기를 들은 피사로는 1532년 11월 15일 168명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다음날 피사로는 대군을 배후에 남겨둔 채 5000명만을 데리고 피사로와의 회견을 위해 찾아온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은 채 그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30분 만에 끝났으니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학살이었다. 아타우알파한테 몸값으로 방 한가득 황금을 받은 피사로는 황금만 챙긴 뒤 2∼3개월 뒤에 그를 처형했다. 이듬해 11월 피사로는 한 번의 대접전도 없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무혈입성했다.
피사로는 망코 잉카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3년 후 망코 잉카는 도주하여 빌카밤바에 새 수도를 건설한 뒤 스페인군에 대항할 반란군을 결성했다. 반란군은 한때 20만명까지 늘어나 스페인군을 포위하는 등 선전했으나 그 다음해에 진압당했다. 망코 잉카가 암살당한 후 그의 후손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세상을 떠나면서 잉카는 1572년 영원히 멸망하고 만다. 그 사이 정복군은 내부 분열을 겪는다. 피사로의 협력자 알마그로가 자기 몫의 전리품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것.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피사로도 1541년 알마그로를 지지하는 무리에 의해 살해됐다.
◇‘늙은 봉우리’란 의미를 가진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사람의 접근이 매우 어려운 페루 남부 쿠스코 시의 북서쪽 우루밤바 계곡 주변 산 정상에 세워져 있어 비교적 잘 보존됐다.
첫 번째, 남미에는 불행히도 소와 말 같은 유럽에는 흔한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가축과 생활해온 유럽인들은 동물성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으나 신대륙 사람들은 그게 없어 유럽인들이 들여온 새로운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
두 번째는 강철과 총의 부재다. 잉카에는 금광과 은광만 넘쳤을 뿐 무기로 쓸 철을 캐낼 만한 철광이 드물었다. 잉카 전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구석기 수준의 돌 무기만으로 총칼로 무장한 유럽인들의 화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 번째, 잉카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키푸’라는 밧줄과 끈의 매듭으로 소규모 정보를 기록하는 게 전부였다. 따라서 잉카인들은 스페인의 멕시코·카리브해 연안 점령 등 국경선 너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정보량 부족과 소통 부재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와 같았다.
네 번째는 중앙집권 체제가 채 갖춰지지 않았고, 갑작스레 대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폭정에 시달리며 조공을 바치던 수많은 부족들이 스페인 군대에 협력, 반잉카의 선봉에 선 점이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 기사입력 2010.01.08 (금) 17:43, 최종수정 2010.01.08 (금) 17:39
'◀문학 및 독서▶ > 책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좋은 이별(김형경 지음/푸른 숲 펴냄) (0) | 2010.01.29 |
---|---|
서울의 모습 제대로 알고 있나요?부산대 강명관 교수 ‘사라진 서울’ 출간 (0) | 2010.01.14 |
학술. 교양 (한국일보) (0) | 2009.12.13 |
김마리아 시인의 시 53편이 실린 세번째 동시집 (0) | 2009.11.11 |
팔순청년의 생활속 참선 수행이야기2009:11:10 (0) | 2009.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