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화첩기행]<7>영혼의 안식처 잔지바르 | ||
어머니 젖내음 닮은 바닷 바람 청춘들의 붓끝에 생명을 싣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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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곤궁할 땐 잔지바르에 가 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인도양의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을 달려 잔지바르 섬에 도착해서야 이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해안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와 미로 같은 골목길은 오래전부터 배고픈 영혼들의 안식처가 돼 왔다. 바다는 마치 자궁의 양수처럼 섬을 감싸안고 골목길은 그 자궁에 이르는 핏줄이 된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조차도 오래된 익숙함에 빨려드는 것은 어머니 자궁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것일 게다.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김수근 건축철학의 요체가 ‘자궁 공간’이 아니었던가. 이 섬의 중심인 ‘올드스톤타운’의 좁은 골목길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이웃과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막다른 골목 한켠에 들어서니 팅가팅가류의 그림을 양산하는 무명작가들의 집단 작업실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하는 골목길 그림가게에 고용돼 일하는 작가들이다.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어깨너머 도제식으로 익힌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한 가게에 두세 명씩 적을 두고 주문그림을 찍어내지만 스스로를 그림기계라고 자조하지는 않는다. 그림은 길거리 화가들에게 예술 이전에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한 일본 자원봉사자한테서 그림을 배웠다는 키웽게(32)와 심바(28)는 짬짬이 버려진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작업을 시도한 결과물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씩 웃는다. 분명 잔지바르의 하늘과 바람이 그 영혼의 캔버스를 풍족히 채워주리라. 골목을 빠져나오자 퇴락한 옛 성채가 바다를 바라다보며 떡 버티고 서 있다. 성루에 오르려니 입구에 아트갤러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루를 화가들의 창작공간이자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창 작업 중인 오킹(27)은 잔지바르의 풍광을 자유로운 붓 터치로 캔버스에 풀어내고 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는 그의 화풍은 반 고흐를 닮았다. 그가 잔지바르의 고흐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훗날 잔지바르 작가들이 세계미술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잔지바르섬은 그렇게 화가들을 양육하고 있다.
작가 정보를 얻기 위해 잔지바르 문화예술센터를 찾았다. 마침 무슬림 화가가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긴다. 이런저런 차담을 나누다 보니 스스럼없이 사생활까지 털어놓는다. 자신을 아내 둘, 자녀 7명을 거느린 가장이라고 소개한 그는 부부 생활에 궁금증을 보이자 “두 아내와 이틀씩 번갈아 잠자리를 한다”며 화통하게 웃는다. 이방인의 괜한 호기심마저 귀찮아하지 않는 표정이다. 바로 잔지바르 사람들의 심성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가 대뜸 존다실버(71) 작가를 만나 보았느냐고 묻는다. 잔지바르의 대표작가이자 탄자니아의 우표에도 그의 그림이 등장하는 작가라며 손을 이끈다. 하마터면 숙소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대작가를 못 만나고 이곳을 떠날 뻔했다. 무슬림 작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숙소 건너 골목의 한 저택. 한때는 식민지배자들의 화려한 주거공간이었지만 지금은 퇴락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노 작가는 얼굴 가득 웃음으로 손님을 맞는다.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9살 때 잔지바르로 이주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964년까지 이곳을 통치했던 술탄의 궁전에서 재봉사로 일했다. “나는 미술을 위한 연습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잔지바르 섬과 가정 환경이 나의 미술 안목을 키워 주었다.” 그는 오만제국과 인도, 페르시아, 유럽의 건축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잔지바르의 골목 풍경을 탄자니아 우표 디자인에 풀어 넣기도 했다. 그는 최근까지 잔지바르 골목 풍경을 수채화로 그려왔다. 놀라운 것은 현지 화랑에서 판화도 아닌 4∼6호 크기의 단순한 프린트물이 우리 돈으로 3만원에 팔려나간다는 사실이다. 두 번 중풍으로 쓰러진 그는 요즘 소품 위주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잔지바르 올드스톤타운은 이슬람과 기독교, 힌두교가 한데 어우러진 코스모폴리스탄적 골목이야. 세계가 그렇게 살갑게 살아야지.” 그가 모스크와 힌두교 사원, 교회가 공존하는 올드스톤의 골목 풍경을 그리는 이유다. 몸이 회복되면 캔버스에 오일 페인팅 작업을 하겠다는 그는 캔버스 앞에서 숨을 거두기를 염원한다.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구하려 혈안이 되어 있지만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는 아프리카대륙의 미술을 아프리카미술로 단순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서구가 규정한 ‘아프리카’이기 때문이다. 석양이 바닷물에 분홍빛을 풀어 놓을 때쯤 성채 안에 자리한 식당에선 북과 양철깡통의 리듬에 맞춘 남녀 6인조의 전통 춤판이 벌어졌다. 식사 값에 약간의 공연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아깝지가 않다. 몸이 그야말로 리듬이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다. 어둠이 깔리자 성채 밖 해안에는 야시장이 불을 밝힌다. 각종 해산물 꼬치와 과일들이 노점 매대마다 가득 쌓여 있다. 손잡은 연인들이 조잘거리며 그 앞을 지나친다. 잔지바르는 9세기경엔 계절풍을 따라 교역하러 온 페르시아 상인들로 북적였다. 1832년부터 150년간은 남부 아라비아의 해상왕국인 오만의 술탄이 이곳을 통치했다. 술탄의 궁정과 성채들은 대부분 이 시대 것들이다. 포르투갈의 지배와 노예무역의 전초기지라는 아픔의 상처도 곳곳에 남아 있다. 야시장 한켠에 자리를 틀고 인도양 바닷바람을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이곳을 거쳐간 역사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서. 성채 안 야외 원형극장에서 들려오는 젊은이들의 힙합댄스 무대의 함성이 바람에 실려 퍼진다. 발길을 숙소로 돌렸다. 미궁의 골목길이다. 어디를 향해 난 길일까. 미궁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성을 부여한다. 저 어디쯤에 동경의 장소가 놓여 있을 것만 같다.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영혼의 안식처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영혼의 공간을 안무하는, 잔지바르다. 잔지바르(탄자니아)=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
2007.03.12 (월) 1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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