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화첩기행]<9>색채의마술사은데벨레족 | ||
원색의 절묘한 배합… 삶이 곧 예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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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위에서 한 노인이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 짐바브웨의 전통악기인 은비라다. 엄지손가락으로 튕겨 연주한다고 하여 일명 엄지 피아노로 알려진 악기다. 갖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주고 떠난다. 단돈 몇 푼을 안겨주었지만 미련없이 갈 길을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초원 위의 성자를 본다. 초탈한 모습이다. 마시빙고를 떠나려니 그 노인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버스에 몸을 싣고 짐바브웨 제2 도시인 불라와요로 향했다. 중간 정류장마다 과일 등 먹을거리를 손에 든 상인들이 창가로 목을 들이민다.
오후에 도착한 불라와요는 바쁘지가 않다. 시민들이 한가롭게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빅토리아폭포행 기차를 타려면 시간은 아직 많아 남아 있다. 시립미술관격인 불라와요 내셔널갤러리를 찾았다. 전시품엔 가격표가 붙어 있고 12개의 작가 스튜디오가 함께 있어 작업실도 구경할 수 있다. 작가와 직접 가격을 흥정할 수도 있어 컬렉터들에겐 매력적이다. 이날도 서구관광객들이 스튜디오를 찾아 작가와 흥정을 벌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대중에 다가서는 미술관 모습이다. 큐레이터가 작가와 작품 소개는 물론 판매까지 알선한다. 오후 5시에 문을 닫는 갤러리를 나서니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불라와요 기차역에서 빅토리아폭포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끝없는 초원 위를 달리는 기차는 중간역들에서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면서 어둠 속을 질주했다. 불빛 한 점 없으니 암흑에 빠져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기차여행은 언제나 낭만적이게 마련. 이웃 침대칸에선 흥겨운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대학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한다는 호주 청년은 100일간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라 했다. 홀로 아프리카 배낭여행 중인 일본 청년도 눈에 띈다. 한데 어울려 춤판을 벌였다. 기차는 지쳐 쓰러진 그들을 침대에 누인 채 아침으로 달려갔다. 정차역마다 원숭이들이 어슬렁거리며 눈길을 준다. 14시간 달린 끝에 빅토리아폭포역에 도착했다. 역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눈을 붙였다. 현지인 가이드가 잠베지강의 석양 뱃놀이가 일품이라며 잠을 깨운다. 저녁놀을 바라보며 즐기는 간이 선상파티다. 간단한 음료와 주류가 제공된다. 짐바브웨의 춤과 노래가 흥을 돋우고 하마와 악어 떼가 배를 따른다. 잠베지강 너머로 해가 진다. 흐르는 물과 함께 시심도 흐른다. 밤이 찾아왔다. 허름한 숙소엔 음료와 맥주 등을 파는 구멍가게가 하나 딸려 있다. 그 앞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맥주병을 비우고 있다. 술기운이 오를 무렵 구멍가게에선 힙합 음악이 흘러나온다.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특별한 조명과 무대가 없어도 젊은이들의 움직임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현란하다. 아프리카에서 음악은 초원 위의 바람 같은 것이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폐철로 만든 가면 등장식이 이채롭게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지만 시각적 호소력이 대단하다. 숙소 벽면에 그려진 문양과 어우러져 예사롭지가 않다. 커튼 문양도 마찬가지. 원색의 능란한 조합이 놀랍다. 이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은데벨레족의 타고난 예술적 감성이 느껴진다. 은데벨레족이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벽에 그려진 은데벨레 문양을 살펴보던 김종우 작가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원색을 깊게 조율하는 기법이 놀랍다”고 평했다.
문득 춤판에서 원색 옷차림으로 어우러지던 흑백청년들의 하모니가 은데벨레의 색채 혼합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초원 위에 원색의 옷을 입고 나무그늘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바로 은데벨레 색채의 어울림이다. 서구작가들을 매료시킨 것도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은데벨레 사람들의 벽장식 디자인과 구슬세공 장식의 색채·패턴은 다채롭다. 기하학적인 구성에 꽃, 뱀, 새 그리고 작은 동물들까지 녹여내고 있다. 요즘엔 알파벳문자, 숫자, 빌딩, 비행기 등이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원색의 조화로 모던한 느낌을 준다. 유럽 작가들과 디자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은데벨레족이 호전적인 주변 종족과 맞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예술적 전통이 구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400년 전부터 은데벨레 어머니들은 딸에게 현란한 색과 기하학적인 무늬로 벽이나 몸을 치장하는 것을 가르쳐 왔다. ‘칼’ 대신 ‘색’으로 종족을 지켜온 것이다.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을 흐르는 잠베지강 래프팅에 도전했다. 단애가 아찔하다. 검은 빛을 내는 돌이 조각처럼 서 있다. 급물살과 서너시간 겨룬 끝에 도착한 곳엔 통가족의 터전이 있다. 각종 돌과 나무로 만든 조각상품을 좌판에 벌여놓고 호객행위를 한다. 여행객의 옷, 신발과 자신들의 상품을 바꾸자고 조르기도 한다. 아프리카를 여행할 땐 옷과 신발 등을 여분으로 가져가 물물교환의 재미를 맛보는 것도 좋다. 물에 젖은 냄새나는 양말마저 벗어달라기에 할 수 없이 벗어주니 목거리 하나를 주며 이젠 티셔츠를 벗어달라고 야단이다. 자칫 벌거숭이가 될 판이다. 공산품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비로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빅토리아폭포 앞에 섰다. 물보라가 물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폭포계곡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다. 장엄하다. 물보라가 ‘자연의 성수’처럼 몸을 적신다. 우비도 없이 폭포 주위를 거닐었다. 온갖 삶의 찌꺼기들이 씻겨지듯 정신이 맑아진다. 물줄기가 물보라에 얼굴을 살포시 감춘다. 존재의 실상도 그러하리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계곡의 바위들을 감싸안고 부유하듯 떠다닌다.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큰 북을 두드리듯 멀리 퍼진다. 자연의 리듬이다. 원주민들이 ‘천둥치는 연기’라 했다 하지 않은가. 리빙스턴의 동상이 폭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서 가던 화가 김종우가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이 이 자리에 섰다면 또 다른 명작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햇살이 물줄기를 화폭삼아 오색 무지개를 그려 놓는다. 빅토리아폭포가 구름을 만들어내는 공장 같다는 화가 권순익은 용오름처럼 솟구치는 힘에 전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폭포수가 천길 낭떠러지로 내리꽂힌다. 힘찬 붓질 같다. 물의 퍼짐과 솟구침은 동양화의 수묵을 닮았다. 옷이 흠뻑 젖도록 두 작가는 서너 시간을 걸었다. 무릉도원 화폭 속을 거니는 양 마냥 신났다. 오늘만큼은 신선이다. 작가들의 화폭도 벌써 빅토리아 폭포수로 채워졌다.
불라와요(짐바브웨)=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
2007.03.26 (월) 1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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