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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화첩기행]⑪산 SAN 족 회화 ;고향 앙골라에 대한 그리움 화폭 위

눌재 2010. 5. 12. 20:36

[아프리카 화첩기행]고향 앙골라에 대한 그리움 화폭 위에 넘실
⑪산 SAN 족 회화
 ◇산족 화가 프라이 시피파의 그림. 단순한 구도가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에 빠져들게 한다.

# 낭만이 흐르는 워터프런트의 밤

해질녘 대형 쇼핑몰이 자리 잡은 워터프런트를 찾았다. 테이블마운틴이 저만치서 병풍처럼 서 있다. 누구는 물개가 노니는 석양의 워터프런트 바닷가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왠지 눈물이 난다고 했다. 새삼스럽게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찡하게 다가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워터프런트에 어둠이 내리고 갖가지 사연을 안고 이곳을 찾은 이들의 이야기는 무르익어 간다. 갈매기들이 정박해 있는 유람선 위를 부유한다. 선착장에 들어선 레스토랑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와인 잔을 비우며 낭만의 밤에 빠져들고 있다.

유럽에서 호화 유람선을 타고 이곳에 왔다는 60대 부부는 은퇴기념으로 세계유람 중이라 했다. 들르는 곳이 이젠 마지막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친다. 회한도 밤바다에 희석되리라 믿는다.

동행한 권순익·김종우 화가의 화폭에도 갈매기들이 내려앉는다. 서울에 두고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외로움이 되어 와인 잔을 텅 비운다. 척박한 작가의 삶이지만 오늘 밤만큼은 푸념이 달콤한 안주가 된다. 술기운이 오르자 갑자기 권 작가가 밤바다를 향해 아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작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에 대한 평소 미안함의 표출이 아닐까. 테이블마운틴의 검은 실루엣과 워터프런트의 야경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코믹한 차력사의 불꽃쇼와 흑인 연주단의 거리공연도 끼어든다. 살아 있음이 아름다운 밤이다.

◇케이프타운의 마마 아프리카. 밤이면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얼터너티브 탱고 리듬에 하나되는 곳이다.

# 얼터너티브 탱고가 있는 마마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는 아프리카 목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많다.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갤러리에 전시된, 단전호흡을 하는 듯한 콩고 루바족의 목조각과 코트디부아르 세누포족의 발 큰 인체 조각상은 단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큰 발은 신뢰와 지도자의 상징이다. 요즘엔 값싼 모조품을 진품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많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기 위해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설탕이나 꿀을 발라 땅속에 묻어 ‘세월’을 급조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그림값이 급등하면서 부유층이 밀집한 칼크 베이(Kalk Bay) 지역엔 현대회화를 취급하는 갤러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줄루족의 토기 전통이 강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대 세라믹 작품들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화려하면서도 모던해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비행기로 두세 시간 거리의 남아공 북부에 살고 있는 벤다족의 목조각과 클레이 조각도 수준급이라고 한 갤러리 주인은 귀띔한다.

케이프타운에 들르는 관광객들은 롱스트리트에 위치한 판아프리칸 마켓에 들러 아프리카 공예품들을 사기도 한다. 인접한 레스토랑 겸 바인 마마 아프리카에 들어서니 초저녁부터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얼터너티브 탱고가 흐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잡는다. 모두가 친구 되는 곳이다.

◇동물은 물론 산이나 강의 그림 바탕을 붉은색으로 표현한 김종우의 ‘영혼’. 아프리카에서 붉은색은 열정이라기보다는 영혼을 의미한다.

# 산족의 그림에서 파라다이스를 보다

케이프타운 외곽으로 300km 정도를 달리면 흔히 부시맨으로 알려진 산(San)족의 작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공동체인 ‘헝 앤 크웨(!Xun & Khwe)’ 아트커뮤니티가 있다. 케이프타운 사람들은 산족에 대해 동양인을 닮았다고 말한다. 피부도 아주 검지 않고, 체구도 아프리카 흑인들보다 왜소한 편이다.

원래 산족은 보츠와나와 나미비아에 걸친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이 보다 풍부한 곳으로 동물과 함께 이동해 살면서 아프리카 동남부에도 흩어져 살고 있다. 앙골라, 남아공, 짐바브웨, 잠비아 등에 종족 수가 10만명도 채 안 된다.

17세기 유럽 정착민들은 수렵 채집 위주로 살아가는 산족을 동물로 취급했다. 그들의 삶은 부도덕성, 잔인성, 야만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겨 길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산족은 본래 방랑자란 뜻이지만 식민지배자들이 ‘덤블 속의 사람들’이라 비하하면서 부시맨으로 불렀다. 그날 먹을 것 이상을 탐하지 않으며, 소집단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유럽의 집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세기 들어 산족은 서구에 ‘자연의 상(像)’으로 비쳐졌다. 문명사회를 망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인간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 인간 사회의 이상적인 근거도 거기서 찾으려 했다. ‘원시사회’를 이상화한 폴 고갱 역시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할 수 있다. 그는 파라다이스의 이상을 타히티 섬에서 찾았다고 믿었다. 아니, 유토피아의 꿈을 투영했다.

1961년 앙골라 내전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산족은 남아공에 많이 유입됐다. 산족 그림은 대담하고 추상적인 구성으로 모더니스트들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자연의 조화로운 묘사는 유럽 미술시장에 걸맞은 것이었다. 야생동물과 초원, 그리고 그 속의 생활방식을 묘사한 그림은 서양인들의 구미를 당겼다. 남아공 산족 미술의 낭만적 이미지들은 그들의 고향인 앙골라를 재현한 것이다. 평화, 자유, 풍요를 얻고 싶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산족 화가 쿠냔다 시카모(Kunyanda Shikamo)는 앙골라에서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앙골라에서의 삶은 너무나 너무나 좋았습니다. 초원은 풍성했고… 예, 맞아요. 먹을 것이 가득했습니다. 과실은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졌어요.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요. 이것들은 전쟁이 오자 모두 바뀌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변하게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규칙에 따라야 했습니다. 전쟁 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았어요. 우리는 그때 행복했지요.”

특별한 때에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린다. 과거와 현재가 힘겨울 때가 바로 그때다. 또, 꿈을 꿀 때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린다. 산족 화가 페르시아노 은달라( Ferciano Ndala)와 고인이 된 프라이 시피파(Flai Shipipa)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막과 평원을 동물들과 함께 떠도네. 떠도는 자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거야. 초원 위에서 시뻘건 석양에 가슴을 젖셔보지 않은 자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오. 인생도 어차피 이 세상을 한동안 방랑하는 거야.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나는 밤에 누워 꿈을 꿀 뿐이야.” 산족의 자연과 인생에 대한 관조가 그림이 됐다.

사람들은 남아공 산족 사람들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서구의 주류 미디어는 ‘서양화된 산족’과 ‘전통적인 산족’ 사이에 명백히 다른 점을 애써 강조한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아프리카를 고정관념에 넣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미 마음속에 이미지를 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케이프타운(남아공)=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