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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진 역사] <4> 열악한 환경 헤치며 성장한 한국 수중고고학<세

눌재 2010. 6. 19. 02:22
[바다에서 건진 역사] <4> 열악한 환경 헤치며 성장한 한국 수중고고학<세계일보>
  • 입력 2010.06.08 (화) 17:17, 수정 2010.06.09 (수) 11:17
거센 물살·탁한 시야 맨몸으로 맞서며
보물·도자기 세상 밖으로
  • 우리나라에서는 30여년 동안 모두 15건의 수중 유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바닷속 어둠에서 잠자던 수십만 점의 귀중한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가 대거 빛을 보게 됐고, 고려시대 선박 7척 등 9척의 침몰선도 인양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 수중고고학만이 갖는 발전 속도와 성과로 여겨지고 있다.

    ◇1976년 신안해저유물 당시 해군 해난구조 대원이 중국 도자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로 기록된 신안해저유물은 발굴 당시 장비와 인력이 부족해 해군 해난구조대원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중고고학의 시작점은 1976년 신안해저유물 발굴부터다. 당시는 수중 발굴조사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제대로 된 발굴 장비가 없어 해군 해난구조대 소속 잠수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국에서는 수중고고학의 중요성을 인식해 연구원 2명을 해저 탐사기술이 앞선 일본에 보내 잠수 등 각종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짧은 해외연수로는 국내 바다의 거센 조류와 탁한 시야를 극복하고 수중에서 제대로 된 발굴작업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현장을 탐방했던 한 미국의 수중고고학자는 ‘서해바다 같은 곳에서 발굴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미친 짓’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국내 두 번째 수중 발굴조사로 기록된 1984년 완도 해저발굴에서는 그나마 해군의 지원마저 어려워 유물을 확인하고도 발굴을 진행하기 곤란한 상황을 맞았다. 다행히 신안 해저발굴에 참가했던 해군 잠수사가 제대 후에도 민간인 자격으로 합류하면서 발굴이 가능해졌다. 그는 제대 후 군 시절 경험을 살려 잠수 관련 회사를 운영 중이었다. 이때부터 민간 잠수사가 발굴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바닷속 유물을 해군이나 민간 잠수사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 수중 유물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수중고고학자들이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유물의 분포 상황이나 인양을 주도할 수 있는 시스템과 환경 마련이 절실했다.

    이 같은 바람과 노력은 1994년 수중발굴을 전담하는 기관인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설립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당시 수중 발굴 요원들은 바닷속에서 건진 발굴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를 진행하는 한편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1991년)와 목포 달리도선(1995년) 발굴도 병행하면서 수중 발굴에 본격 나서게 된다. 그러나 1995년 무안 도리포 해저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때까지도 수중 발굴은 해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후 1999년부터 수중 탐사 첨단장비인 수중음파탐지기 등이 도입되는 등 제대로 된 장비들을 하나둘씩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연구조사자들을 대상으로 해저 발굴 잠수교육을 하는 등 체계적인 발굴시스템이 마련되게 된다. 이 같은 준비작업은 2002년 전북도 군산 앞바다 비안도 해저유물 발굴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유물이 발견된 지역은 새만금사업이 진행되면서 해저지형이 변해 시급한 발굴조사가 필요했으나, 2002년 6월 연평해전으로 해군 해난구조대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이 비안도 조사는 연구조사자들이 직접 입수해 발굴을 진행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태안 대섬 발굴 때 도굴됐던 청자사자모양향로. 당시 발굴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가 장물로 팔기 위해 도굴했으나 범인이 잡히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하지만, 수중 발굴 조사를 위한 잠수 기술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발굴현장에 투입된 요원들은 약간의 시간이라도 생기면 입수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 자체적으로 팀을 꾸려 잠수적응 훈련을 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또한, 바닷속 유물 상태 등을 기록하기 위한 수중 촬영 기술을 익히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숙련되지 않은 잠수 기술을 가진 연구진이 제대로 된 작업을 하기에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적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광범위한 유물 현장을 발견했지만 확보되지 않은 시야와 4노트 이상의 빠른 조류는 발굴 작업을 방해했다. 또한, 유물 인양 작업 가능 시간은 정조(停潮)시간 30여분에 불과했다. 요원들은 다음 정조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사방 3m의 좁은 어선 위에서 6시간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하는 고통도 참아내야 했다. 숱한 어려움을 겪은 비안도 발굴 조사를 통해 요원들은 더 이상 해군에 의존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업을 완수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2003∼04년), 새만금방조제 안쪽의 야미도(2006∼09), 충청남도 태안군 대섬(2007∼08), 태안 마도(2009∼현재)의 발굴 성과로 이어졌다.

    수중 발굴사를 얘기하다 보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굴꾼이다. 이들의 마수는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복병이나 다름없다. 2007∼08년 2만여 점에 달하는 고려청자를 싣고 있던 선박을 인양한 태안 대섬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한 획을 그은 발굴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발굴에 직접 참여한 민간잠수사에 의해 도굴이 빚어진 아픔도 녹아 있다.

    태안 대섬에서 나온 유물 중 고려청자는 특유의 비색과 단아한 생김새, 문양의 아름다움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특히 사자모양 향로는 뚜껑과 받침이 짝을 이루고 있으며, 해학성이 넘치는 사자의 표정 등으로 대섬 발굴의 상징과도 같았다. 발굴 작업에서 향로 받침은 2개가 인양됐지만,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을 붙인 뚜껑은 하나밖에 인양되지 않아 당시 조사 참가자 모두가 아쉬워했다. 그런데 뚜껑은 바다가 삼켜버린 것이 아니라 도굴범이 몰래 빼돌렸다는 사실이 얼마 후 밝혀졌다.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硏 수중발굴과장
    수중 발굴에 참여한 민간잠수사 C씨는 여러 건의 수중발굴에 참여해 왔고, 작업 과정에서 솔선수범해 동료의 신뢰가 컸다. 대체로 잠수는 2명이 짝을 이뤄 입수하는데, 그는 항상 부지런히 행동하면서, 동료 잠수사보다 5분 정도 일찍 입수하고 조금 늦게 물 밖으로 나왔다. 때문에 현장의 모든 사람이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잠수사보다 먼저 입수한 것은 함께 짝을 이룬 동료 잠수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발굴한 유물을 거둬 한 곳에 숨겨 두었다가 발굴이 끝난 후 현장에 다시 들어가 숨긴 청자 등 유물을 물래 건져내 왔다. 그는 결국 장물아비와 함께 유물을 외국으로 빼돌리려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도굴에 대비한 각종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C씨의 도굴 사건 이후 입수하는 모든 발굴 조사요원의 헬멧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인양선박 위에서 이를 지켜볼 수 있는 CCTV가 설치됐다. 이는 도굴을 예방하는 효과뿐 아니라 잠수사의 안전과 발굴현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각계의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내년에는 200t 규모로 조사 인원 30명이 현장에 상주할 수 있는 전용 인양선 건조가 마무리된다.

    지난 30여년간 이 같은 우여곡절을 거친 한국 수중고고학이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이런 만큼 한국 수중고고학도 단순히 유물을 인양하는 단계에서 바다와 인간의 관계 속에 파생된 문화유산까지 영역을 확장하는데 관심을 가져 할 시점이 됐다.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硏 수중발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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