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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주 “유한성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헌사”<세계일보>입력 2010.06.21

눌재 2010. 6. 23. 03:53
이석주 “유한성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헌사”<세계일보>
  • 입력 2010.06.21 (월) 13:17, 수정 2010.06.21 (월) 14:18
  • 몇해전 이석주(58) 작가와 함께 북한강변을 거닌적이 있다.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였다. 학교(숙명여대) 강의를 빼고는 늘 그는 그곳 작업실에 머물렀다. 마냥 흘러가는 강을 따라 오가면서 그는 모든 상념들을 삭혀냈다고 했다. 이따금 물안개 낀 강변은 무뎌져만 가는 감수성을 일깨웠다. 강물은 언제부턴가 그에게 집착의 부질 없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흘러감을 붙잡지 말고 그저 바라보라 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사함을 알라고 했다.

    “제 작업은 시간의 유한성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시계와 아스라한 풍경, 그리고 한켠에 놓여진 꽃 한송이가 이를 말해 준다.

    젊은시절 모든 이가 그랬듯 그도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요즘 당시의 그림을 보면 왜 그리 어둡게 그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이 밝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모는 것이 유한하다고 생각하면 다툴 것이 뭐 있으며,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지요.” 그는 최근들어 시들어 가는 꽃들에 더 눈이 가고 있다.

    “사실 우리는 도시적이며 사회적인 시간에 그저 떠밀려 갈 뿐이에요. 시간의 유한성이야말로 이를 통찰케 해 주지요.” 그의 최근작에선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 대신 손때 뭍은 책과 명화가 등장한다. 모두가 영원성과 대비된 유한성이 키워드다.

    ◇한국 극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주자인 이석주 작가는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강조된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달리 저의 극사실주의는 개인의 정서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이석주 특유의 말(馬) 이미지는 또 어떤가. 야성과 이성, 질주에서 시간의 은유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제 작업은 결국 시간의 메타포인 셈이지요.” 그가 일상의 관조자, 낯선 내면세계의 탐험가로 불려지는 이유다.

    한국 극사실주의의 대표작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에 충분하다. 각박한 도시인의 황폐해진 정서를 촉촉이 적셔주는 회화의 가치를 회복켜주고 있는 것이다. 

    ◇‘사유적 공간’
    그는 극사실주의 양식마저도 교조적으로 답습하지 않는다. 온화하고도 정감이 넘치는 이야기 중심의 새로운 화풍을 창출해내고 있다. 캔버스 위에 묘사된 대상은 실재보다 더 실재하는 것 같고, 사진도 구현해내기 어려운 감정의 미묘한 디테일들을 피스(스프레이) 방식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등의 차용과 재구성 방식들은 우리 기억의 앙금들을 다독이며 짙은 향수를 자극한다. 초현실주의 기법(데페이즈망)으로 사유의 여백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사유적 회화, 공감적 회화가 무엇인지 말 해 주는 듯하다. 게다가 거친 듯하면서도 단단하게 구축된 밑칠 위에 섬세하고도 감각적으로 구축한 이미지들은 전사 프린팅에 의존하는 방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우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고인이 된 연극계의 거물 이해랑씨가 그의 부친이다. 30일까지 인사동 선화랑. (02)734-0458 

    편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