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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18) 이탈리아 루가나 와인

눌재 2011. 6. 28. 19:16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18) 이탈리아 루가나 와인<세계일보>
호수 절경에 취하고 ‘그 맛 그 향’에 또 취하니…
  • 레드 와인 천국 이탈리아에서 좋은 화이트 와인을 만나고 싶은 이들이여, 호숫가로 초대하노니 부디 시르미오네(Sirmione)로 오시오. 거기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 가르다가 있고, 그 호수가 잉태한 와인 ‘루가나(Lugana)’가 있으니…. 루가나는 온화한 호수 기후, 시원한 풍경, 풍부한 먹거리를 바탕으로 오늘날 이탈리아의 대표 화이트 와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호텔 파체(Hotel Pace)에서 운영하는 호숫가 카페. 전망도 좋지만 투명한 물빛이 정말 깨끗하다. 카페 뒤에는 바로 호텔이라 기막힌 호수 풍경을 즐긴다.
    ◆투명한 호수가 뱉어내는 화이트 와인 ‘루가나’


    시르미오네를 떠나려고 하니 시름이 온다. 절경 속에 피어나는 포도 꽃이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으로 치환되는 시르미오네에서는 누구도 쉽게 이별을 고하기 어렵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열창했던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죽기 전에 뜨겁게 추억했던 곳이 시르미오네다. 꼬리란 뜻의 ‘시르마’에서 파생한 시르미오네는 가르다 호수 남단 중앙 부근에서 북쪽으로 십리만큼 솟은 꼬마 반도 마을이다. 로마군의 기세에 호반도 놀랐을까. 로마군의 진격에 따라 땅도 군인들의 보행에 맞추려 해서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것일까. 어떻게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대축척지도를 보면 길게 솟은 얇은 땅을 확인할 수 있다.

    시르미오네의 범상치 않은 풍광은 일찍이 로마 시인들의 눈에 들었다. 기원전을 살던 시인 카툴로는 꼬리 끝부분에 별장을 짓고 인생을 노래했는데, 그 땅 끝에 서면 공작새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활짝 펼쳐진다. 시인은 시를 통해 시름을 달랬지만, 육체의 피로는 노천 유황온천이 풀어주었다. 피부병에 특효를 보이는 시르미오네의 온천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멎질 않고 용솟음치고 있어 많은 여행자가 찾는다.

    ◇대표적인 루가나 와인들.
    와인 루가나가 시르미오네의 역사와 관광 자원 덕분에 의미가 더 중해졌다고 말한다면 와인 농부들이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가나의 매력은 청포도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맛과 향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토착 품종 투르비아나(turbiana·정식 명칭은 트레비아노 디 루가나)는 껍질이 두꺼워 늦게 익지만, 그렇다 해도 완숙되었을 때의 당분이 적당해서 도수가 12도 남짓하다. 풍부한 산도는 와인을 병에 담아도 오랫동안 맛을 유지시키는 숙성력을 보장한다. 그래서 마시기에 부담이 없다. 또 산도는 좋은 숙성력을 준다. 그래서 루가나는 고급 화이트 와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은은한 과일향에 중성적인 허브향이 풍기고 아몬드맛이 나는 루가나 와인은 바다같이 넓은 호숫가에서 태어나므로 해산물이나 생선 요리와 먹는 것이 전통으로 내려온다.

    호수에서는 창꼬치·농어·잉어 등이 주로 잡히는데, 은빛 비늘의 라바렐로(롬바르디아 지방에서는 그리 불리지만, 베네토 지방에선 ‘코레고네’라 부른다) 조리는 무척 단순하다. 흰 살에 올리브와 소금만으로 간을 해서 먹는다. 주인장이 가시를 다 발라줘서 여간 편한 게 아니며, 생선의 살결이 곱고 올리브의 향기가 진해서 기름진 맛이 배가된다. 생선 리조토는 우리네의 어죽과 비슷한 맛이 난다. 풍경 좋은 금산의 어죽 맛이 시르미오네 생선 리조토에서 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마른 이라면 단풍이 지기 전에 루가나로 여행 보따리를 챙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은 당장에 인터넷 화보라도 챙겨볼 것이다. 유사한 음식은 어죽만이 아니다. 루가나 와인을 만드는 프란체스코 집에서 점심을 했을 때에는 야채 비빔밥인 줄 알았다. 그가 대령한 야채 리조토는 여러 야채가 밥 위에 흩뿌려져 충분히 비빔밥일 만했다. 나에게 고추장과 참기름만 있었다면….

    가끔 루가나가 그리운 것은 어느 날 저녁거리로 회전통닭 같은 요리를 목도했을 때이다. ‘스피에도’는 각종 고기를 꼬치에 꽂아 여러 시간 불에 바비큐하는 지역 고유 요리인데, 고기로는 닭뿐 아니라 토끼·돼지·기니 파울 등이 포함된다. 루가나에서는 치즈거리로 파마산을 찾으면 촌스럽다. 대신 그라나 파다노가 있다. 파마산 치즈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맛이 나지만, 모양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스카리제로 성(Castello Scaligero) 문을 통과해야 로마 시대의 유명 온천이나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입구가 유일해서 시즌에는 인파에 떠밀려 저절로 가는 것 같다고 한다.
    루가나는 경작면적이 약 900ha인 소규모 생산지이며, 그 토양 대부분은 진흙이다. 빙하가 녹아 호수로 변하면서 바닥에 깔린 고운 모래흙을 남쪽으로 쌓은 것이다. 루가나 남쪽은 곳에 따라 자갈과 암석이 분포하기도 한다. 와인의 맛에서 이러한 토양의 성질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즉 진흙으로 덮인 북쪽이나 약간의 자갈을 포함하는 남쪽이나 간에 그 지역 간의 차이를 와인 글라스에서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맛의 차이는 생산자의 양조 스타일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야 한다. 일부 덤비는 양조가들의 품질은 보잘것없지만, 와인메이커가 침착하게 흠결 없이 양조하면 무난한 맛을 가져다 준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나를 규정하면서 그 품종이 토양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테루아 품종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더 많은 증거를 보여야 한다.

    백 가지의 루가나 와인이 생산되는 요즈음 그래도 뭔가 특별한 개성을 지닌 것을 찾고 싶다면 다음 양조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옷텔라(Ottella), 셀바 카풋차(Selva Capuzza), 프로벤차(Provenza), 카로예라(Ca’Lojera), 페를라 델 가르다(Perla del Garda), 올리비니(Olivini)를 추천한다.

    와인저널리스트·‘올댓와인’ 저자

    ■ 추천 레스토랑 베키아 루가나(www.veccialugana.com)

    ◇야채 비빔밥 같은 리조토. 설익은 밥 위에 페페로니(피망), 콩, 브로콜리 등을 올려 먹는다.
    레스토랑 베키아 루가나는 말처럼 ‘오래된(베키아)’ 식당으로 옛날부터 말을 갈아타던 선술집 겸 식당에서 유래됐다. 최근까지도 미슐랭 별 두 개의 최고급이었지만, 별은 식당에 내리는 게 아니라 주방장에게 내리는 것이라는 미슐랭 가이드의 방침에 따라 주인이 바뀐 지금은 별이 없다. 그런 별스러운 생각 없이 이곳을 방문한다 해도 애스톤 마틴, 마체라티 등 주차한 차들을 보고는 당장이라도 예약하고 싶어질 것이다.

    실내는 로마시대를 다룬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치식 기둥이나 벽돌 벽이 점잖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테라스는 또 어떤지. 가르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풍경은 비가 와도 문제가 없을 만큼 단단하게 묶인 천막 지붕과 휘장 너머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수십 개의 버팀목을 통해 뭍에서 호수로 연장된 나무바닥에는 로맨틱하게도 두 사람만의 식탁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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