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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20) 獨 아르지방의 ‘피노 누아’

눌재 2011. 6. 28. 19:19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20) 獨 아르지방의 ‘피노 누아’<세계일보>
섬세하고 부드러운 질감… 그 고혹적 매력에 푹 젖다
  • 독일 아르 지방 위에서는 더 이상 레드 품종을 키울 수가 없다. 북위 51도에 위치한 세계 최북단 레드 와인 경작지 독일의 아르 지방은 서기 893년에 세워진 수도원 시절부터 와인을 본격 양조해왔다. 오늘날 관능미 넘치는 피노 누아를 재배하는 곳이다. “독일이라면 당연히 화이트야”라고 말하는 애호가들의 가슴 한 편에는 사실 레드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아르 지방의 와인 본거지 데르나우(Dernau) 마을을 포도밭이 병풍처럼 싸고 있으며, 왼편으로 보이는 아르 강 옆으로 철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때 세계 최고가의 와인으로 군림했던 리슬링에 가려 오랜 세월을 비주류로 보내고 있는 독일 레드로 인해 와인 생산국 독일은 화이트와 레드 간의 균형이 결여된 정체성을 부여했다. 접경 국가 프랑스는 레드와 화이트 각각의 품질 수준이 고루 갖춰졌지만, 독일은 레드의 수준은 화이트에 많이 처져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억척스러운 양조가들에 의해 독일산 피노 누아가 시음장에서 빼어난 결과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독일 피노 누아(독어로 슈패트부르군더)의 세계를 찾아 아르 지방으로 향했다. 

    ◇양조장 마이어 내켈의 피노 누아 중에서 가운데가 크라우터베르그 2006년산이다.
    독일의 피노 누아는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경작지 규모로 따지면 프랑스, 미국 다음이며, 호주와 뉴질랜드를 합친 규모보다 크다. 이런 독일 피노 누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유럽에서 와인 맛을 가장 잘 안다고 알려진 유럽 그랑주리의 평가를 한번 살펴보자.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다채로운 유럽 국가 출신의 멤버들이 1995년 빈티지 최고의 피노 누아를 가리는 자리에 모였다.

    여기서 최고 득점의 와인은 독일산이었다. 또한 최고의 지성적인 와인 평론가로 인정받는 잰시스 로빈슨의 시음 결과도 살펴보자. 그녀는 2007년 발표한 기고문에서 “나는 독일의 여섯 피노 누아를 시음하면서 그중에 하나에만 17점(20점 만점) 이하로 평가했고, 프랑스의 여덟 피노 누아 중에서는 네 와인을 17점 이하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의 결과는 무슨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독일산 피노 누아의 발전상을 예측할 수 있다.

    ‘고미유 독일 와인 가이드’의 저자 조엘 페인은 “25년 전에 내가 독일로 이주했을 때에는 레드가 겨우 10% 재배됐었는데, 레드는 묽고, 신맛이 두드러진 형편없는 것이었지만, 이제 33% 이상이 레드이며, 제대로 된 레드가 나온다”고 말했다. 

    ◇아르 지방 포도밭에 분포하는 점판암(slate)은 마치 고기 결과 같은 무늬를 하고 있다. 점토질의 변성암인 점판암은 배수가 용이하고 열 흡수력이 좋아 포도밭에 귀중한 역할을 한다.
    프렌치 패러독스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레드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밭에서도 레드 품종 재배가 증대됐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피노 누아를 ‘잔 속의 섹스’로 표현한 한 마스터 소믈리에의 표현이 독일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메르세데츠 벤츠와 바이엘로 대표되는 독일의 이미지가 피노 누아에 그런 고혹적인 매력을 품게 할 수 있을까. 독일 피노 누아에도 관능미가 묻어난다고 믿는 한 생산자는 독일 피노는 샹볼 뮈지니보다는 쥬브레 샹베르탱에 가까울 것”이라고 서술했다.

    와인과 섹스 혹은 와인의 관능미 같은 담론을 얘기할 때, 와인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전개에 대해 무척 의아해할 것을 잘 안다. 만약에 와인의 기술적인 분야를 논한다면 “아는 체하고 있네” 혹은 “현학적이거나 속물적이야”라는 비난을 보내겠지만, 인류 보편적인 주제인 성을 논제로 삼으면 “퇴폐적이야”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시각을 의식하면서도 관능적인 수사를 나열하는 것은 와인 저변에 깔린 다양한 재제들을 통해 와인이 생활화된 문화다층적 구조를 해부해서 그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와인 여행자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아르 지방에서 피노 누아를 담금질하고 있는 베르너 내켈(Berner Naekel)은 피노 누아의 최고봉으로 널리 알려진 대로 로마네 콩티라고 했다. 그는 독일인으로 독일 땅에서 피노 누아를 양조하지만, 피노 누아의 극상은 프랑스에서 나온다고 망설임 없이 인정했다. 

    ◇1137년 완공된 마리엔탈 수도원의 돌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베르너와 필자(오른쪽).
    그는 이미 세 차례나 로마네 콩티 양조장을 방문했으며, 서른 번 이상의 빈티지 체험을 통해서 그 맛을 잘 기억한다며, 특히 1953년 빈티지가 각별했다고 말한다. 이미 수십년 묵은 그 빈티지를 로마네 콩티 양조장에서 ’53년생 독일 양조인들과 함께 맛보았을 때에는 참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양조장 마이어 내켈의 주인 베르너는 독일 레드의 수준을 고양한 공적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는 수학교사 자리를 버리고 가문 양조장으로 돌아와 면적당 수확량을 확 줄이고, 일조량을 많이 확보하는 방향으로 포도나무들을 배열하고, 숙성을 위해 프렌치 오크통 바리크를 도입하여 피노 누아의 품질을 격상시켰다.

    특히 존넨베르그(Sonnenberg, 태양의 언덕)와 크래우터베르그(Kraeuterberg, 허브 언덕) 등의 단일 포도밭 와인은 피노 누아의 순수성과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와인들은 출시하고 두 달 이내에 모두 매진되지만, 베르너 자신을 위해 남겨둔 몫이 운 좋게도 필자에게도 돌아왔다. 작년 이베이에서 260유로에 낙찰된 2006년 크래우터베르그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생동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테피스트리가 입 안에 있다고 했는데, 나의 공책을 보니 ‘각별한 맛, 골격미, 세련됨, 순수함, 산도와 타닌의 버무림, 우아, 피네스 그리고 본-로마네의 관능미’라 적혀 있었다.

    ◆추천: 마리엔탈 수도원 양조장

    베르너는 자신의 주도 하에 1989년에 설립된 ‘독일 바리크 포럼’을 통해서 자국 땅에 피노 누아의 잠재력을 전파함과 동시에, 로마인들로부터 계승받은 양조의 전통을 다른 나라 땅에다가 심고 있다. 이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포르투갈에 양조장을 세웠으며, 최근에는 쇠락해가던 한 수녀원 양조장을 인수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리엔탈 수도원의 클래시컬 플람쿠헨이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새가 먼저 달려들어 시식하고 있다.
    이 양조장의 자랑거리는 우선 1137년에 지어진 수도원의 돌벽 일부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는 것과 식당에서 굽는 플람쿠헨의 맛이 지역 최고라는 사실이다. 플람쿠헨(Flammkuchen)은 ‘불꽃 케이크’란 뜻으로, 프랑스에서는 ‘타르트 플랑비’라 부른다. 플람쿠헨은 주식인 빵을 화덕에서 굽기 전에 그 온도가 적당한지 살필 목적으로 만들어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모양은 얇은 피자랑 비슷하며, 피자처럼 다양한 토핑도 가능하다. 양파와 베이컨으로만 토핑한 클래시컬 플람쿠헨(6.9유로)은 쌉싸름한 양파 맛이 살아 있어 아침을 배부르게 먹은 직후였는데도 한 접시 뚝딱이었다.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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