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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17) 남부 독일 팔츠 와인

눌재 2011. 6. 28. 19:14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17) 남부 독일 팔츠 와인<세계일보>
千의 얼굴 지닌 ‘리슬링’ 그 오묘한 맛에 흠뻑 취하다
  • 무화과가 골목마다 피고, 로즈마리가 사람 키만큼 자라는 곳이 남프랑스라고 한다면 너무 프랑스 친화적인 생각일 것이다. ‘독일의 토스카나’라 불리는 이곳은 남부 독일의 팔츠 지방이다. 남프랑스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남부 독일 역시 온화하고 풍요로운 대지에서 포도뿐 아니라 레몬을 비롯한 각종 과일과 푸성귀를 길러낸다.

    ◇팔츠의 수많은 양조장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다운 식사 풍경.
    ◆ ‘독일의 토스카나’라 불리는 남부 독일의 팔츠


    한때 독일을 주름잡던 헬무트 콜 전 총리의 고향이 팔츠다. 그는 국빈으로 방문한 인물들을 인근 다이데샤임 마을로 초대해 자신의 단골식당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여기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대처 전 영국 총리, 마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등이 포함된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별 다섯 개의 호텔 다이데샤임 호프에는 그들의 방문을 사진으로 남겨 놓은 레스토랑 ‘슈바르처 한(검은 수탉)’이 지금도 큰 인기를 끈다. 콜 총리가 레스토랑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 때 아마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고향 마을 와인 자랑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팔츠 지방은 스위트 와인으로 알려진 독일 와인의 이미지와는 다른 곳이다. 물론 아이스와인을 비롯한 스위트 와인을 여전히 생산하고는 있지만, 팔츠의 대표적인 와인들은 모두 드라이 와인이다. 독일 와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아이스와인은 여기서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이미지 관리상 어쩔 수 없이 소량 생산하는 곳이 많다.

    ◇이솝 우화 ‘여우와 신포도’를 주제 삼은 프레데리히 베커의 재미난 라벨.
    팔츠의 드라이 와인은 주로 리슬링이다. 이보다 더 향기롭고 감미로운 화이트는 없다. 천의 얼굴을 지닌 리슬링은 싱싱한 꽃 향기를 풍기는 유년 시절에도 맛있고, 노숙한 성숙미를 풍기는 장년 시절에도 맛있다. 즉, 갓 만들었을 때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까지 다채로운 맛을 선사한다. 리슬링 외에도 바이스부르군더(피노 블랑), 그라우부르군더(피노 그리), 슈페트부르군더(피노 누아) 등 ‘피노 삼총사’도 즐겨 가꾸는 품종이다. 콜은 독일의 드라이 와인이 식탁에서 음식 맛을 풍부하게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손님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게다.

    다이데샤임 마을에서 가까운 한 봉우리에 소재한 함바허성에서는 뜻있는 일단의 독일인들이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소망하며 외쳤다. 품질로써 세상에 팔츠 와인을 외치는 양조장으로는 프리드리히 베커(Frederich Becker)가 손꼽힌다. 그는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오크통 바리크(225ℓ 소용량)을 처음으로 채택해 독일의 피노 누아도 프랑스 못지않음을 보여주었다. 30여 년 전에는 바리크 사용이 합법적이지 않아 아무리 맛이 좋아도 바리크에서 숙성한 와인은 등급을 받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피노 누아의 품질만을 따졌다. 그가 만드는 최고 와인은 ‘타펠 바인(테이블 와인)’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과거 등급을 받지 못해 가장 수준 낮은 이름인 테이블 와인을 붙여야 했던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이제 바리크 사용은 독일에서 일반화됐다.

    ◇팔츠의 대표 음식 자우마겐은 비리지 않아 우리 입에도 잘 맞다.
    재미난 것은 그의 포도밭 위치에 있다. 베커의 밭은 대부분 프랑스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경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포도밭 일부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밭일을 하러 나가는 아침마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독일에서는 흔하며, 반대로 프랑스인 가운데서도 매일 독일로 넘어와 밭일을 하는 이도 있다.

    레브홀츠 양조장이 만드는 바이스부르군더도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맑고 진한 꽃향기가 두꺼운 질감 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1993년 바이스부르군더는 여전히 싱싱한 산도를 지니고 있어 앞으로도 그 와인의 진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화이트의 숙성력 역시 레드 못지않음을 쉽게 경험한다.

    ◇레브홀츠 양조장의 대표 한스요르크. 그의 바이스부르군더(피노 블랑)는 맛이 특별하다.
    팔츠에서는 자우마겐(Saumagen)을 맛봐야 한다. 암퇘지 내장으로 만든 이 토속 음식에는 전쟁의 일화가 담겨 있다. 프랑스 군대가 주둔하던 19세기 프랑스군은 매주 세 번 고기를 대령하라고 팔츠 주민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가난해서 고기를 구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돼지 위장을 비우고 거기다가 감자와 야채를 채워 식물성 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자우마겐은 팔츠의 대표적인 음식이 됐다. 화이트 와인에 곁들이면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고양할 수 있다.

    팔츠는 프랑스 부르고뉴와 비슷한 토양에서 부르고뉴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지만 내수가 강해 국제 인지도를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팔츠는 아몬드, 무화과, 밤나무가 포도와 함께 익어가는 풍요로운 땅 위에 아델스부르크(고귀한 산), 로젠베르크(장미산), 바이센슈타인(흰돌), 실버베르크(은빛산), 파라디스가르텐(낙원) 등 이름이 예쁜 마을도 많다.

    가을에 팔츠를 여행한다면 양조장에서 필시 페더바이젠(막걸리 같은 색과 단맛을 내는 발효 중인 와인)과 자우마겐을 추천 받을 것이다. 맛이 제법 잘 어울린다. 끝없이 즐기다가는 배탈이 나기 십상이지만,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밤으로 수프를 끓여 마시면 속을 달랠 수 있다.

    글·사진=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올댓와인’ 저자

    ◆추천: 와인바 에젤스부르크 (Eselsburg)

    ◇와인바 에젤스부르크의 실내 모습. 실내가 아닌 마당에 자리를 잡고 싶다면 꼭 예약해야 한다. 마당 자리가 먼저 차기 때문이다.
    일명 당나귀 언덕인 에젤스부르크는 무스바흐 마을에 있다. 다이데샤임에서 기차를 타면 한 정거장이다. 호색한 예술가가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40여 년 전에 지은 단층 건물에 위치한 이 와인바는 언뜻 보면 주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같다. 둔탁한 나무와 돌들로 실내 장식이 돼 있어 수백년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오후 5시에 문을 여는 이곳의 음식은 아주 토속적이다. 소시지, 자우마겐, 돼지 간 등이 안주거리로 나오는데 음식이 믿을 만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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