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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21>프랑스 보르도 와인

눌재 2011. 6. 28. 19:21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21>프랑스 보르도 와인<세계일보>
척박한 자갈밭서 피어난 화이트·레드 ‘꽃’… 그 은은한 향
  • 레드 와인의 메카 보르도에서, 거기다 그 척박한 자갈밭에서 레드뿐 아니라 화이트까지 양조하는 양수겸장의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를 찾았다. 와인 여행자들의 나침반이 대부분 메독으로 맞춰져 간과하기 쉬운 곳, 페삭·레오냥으로 가면 기가 막힌 화이트와 예의 레드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보르도 남쪽 페삭·레오냥 마을에 있는 몽테스키외 가문의 샤토를 바라보면서 이런 망상에 젖어본다. 프랑스 헌법뿐 아니라 미합중국 헌법에도 거대한 영향을 끼쳤던 권력분리론의 몽테스키외가 와인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어 있는 보르도 출신이란 사실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포도밭을 가로질러 샤토 입구에 다다른다.
    보르도시 남부에 있는 그라브 지방은 자갈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지만, 좋은 와인은 거의 페삭·레오냥에서 나오기 때문에 1987년 드디어 페삭·레오냥은 별도의 원산지 명칭으로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했다. 고급 레드 와인들이 즐비한 메독 지방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화이트가 변변치 못하단 것인데, 페삭·레오냥에 오면 그런 걱정이 없다. 프랑스 정부는 페삭·레오냥 포도밭에서 생산된 레드와 화이트 각각을 다 인정한다. 그러니 부르고뉴처럼 양조장에서 싱싱한 청포도와 검은 포도를 둘 다 수확한다. 양조장 식구들의 식탁 위에는 항상 화이트와 레드가 한 쌍으로 오르니 먹거리가 더 풍성해진다.

    그라브 지방 고문서를 살펴보면 1365년에 한 귀족 집안에서 터를 잡고 밭을 가꾼 한 포도원이 언급된다. 18세기에는 그 포도원을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미스란 사람이 사들여 자신의 이름을 와인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해서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Chateau Smith-Haut-Lafitte)가 역사의 페이지에 등장하였다. ‘오’는 높다는 뜻이고, ‘라피트’는 투수의 마운드처럼 생긴 둔덕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샤토의 뜻은 ‘스미스의 높은 둔덕’을 말한다.

    ◇파란 캡슐은 레드, 연노란 캡슐은 화이트.
    보르도 대부분의 샤토는 장강 같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손 바뀜이 많이 일어났다. 1855년 와인 등급을 지닌 메독의 61개 샤토 중에서 59개가 소유권이 바뀌었다. 오직 두 군데만이 동일 가문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 이런 소유의 변화는 메독을 벗어나도 마찬가지다. 페삭·레오냥에 있는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 역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다니엘 카티아르, 양손으로 폴대를 찍으며 균형을 유지하는 프랑스 국가대표 스키 선수였던 그는 이제 화이트와 레드 양조에 균형을 추구하는 인생을 광고회사 경영자였던 아내 플로랑스와 같이한다.

    다니엘과 플로랑스, 이 둘의 인생 2막은 최근 들어 빛을 발했다. 20년 이상 포도밭을 갈고닦은 결과 화이트와 레드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고, 많은 자본을 들여 조성한 포도밭 옆의 호텔과 레스토랑은 와인투어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또 화장품 사업에서도 성공했다. 포도 씨로부터 추출한 항산화물을 기초로 만든 화장품 브랜드 코달리는 서울에서도 팔리고 있다. 여기는 아마도 보르도 샤토 중에 가장 여유롭게, 그리고 가장 안락하게 여행자를 맞이하는 곳일 것이다.

    ◇지하 셀러에 숙성 중인 오크통의 대부분은 메독의 특1급 샤토처럼 자체 제작한다.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의 레드는 메독의 맛과 아주 다르진 않지만, 애호가들이 느끼는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메독보다 온화한 기후대에 놓여 있어 텁텁하고 거친 타닌이 여기서는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메독보다는 비교적 일찍부터 즐길 수 있다. 또 스미스 오 라피트는 와인의 향기 속에 미네랄 향취가 많이 풍긴다. 산화된 철맛 같은 풍미가 뚜렷하게 난다. 이는 포도밭 토양 밑에 도사린 여러 지층의 특성이 와인으로 치환된 것이다. 스미스 오 라피트 화이트는 맛이 좋다. 생동감 넘치는 신맛의 토대 위에 신선한 과일 향기가 난다. 예리한 산도와 방향이 균형을 잘 이룬다.

    이들 부부는 숙소에서 양조장으로 양조장에서 호텔로, 그리고 다시 숙소로 이동할 때에는 자전거를 탄다. 그들의 예술 애호는 포도밭에 설치한 작품에서 쉽게 드러난다. 포도밭 입구에는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의미하는 토끼 조각품이 있고, 양조장 지하 시음실에는 한국 작가 안철현의 설치작품이 있다.

    ◇샤토에서 만나는 첫 번째 예술품은 영국 작가 바리 플라나간의 ‘환대’라는 제목의 조각품으로, ‘포도주의 신(神)’ 바쿠스를 의미하는 토끼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튀어오르는 모양이다.
    남부 프랑스의 먹거리는 풍성하다. 그중에서 비둘기 요리가 좋겠다. 뭐라고 비둘기라고. 놀라지 마라. 도시에 사는 비둘기가 아닌 야생 비둘기를 말한다. 남부 프랑스인들은 비둘기를 맛나게 먹는다. 스미스 오 라피트와 비둘기는 궁합이 맞다. 스테이크도 아닌데 이런 비둘기에다가도 ‘레어(rare, 살짝 익힌)’니 ‘미디엄(medium, 적당히 익힌)’이니 ‘웰던(well done, 완전히 익힌)’이니 하는 굽기의 정도를 적용해서 난처하지만, 주문할 땐 웰던이 무난하니 그렇게 하자. 비둘기 다리는 바싹 익혀 나오니 닭다리처럼 담백하고 고소하다.

    비둘기 다리를 뜯어 입으로 가져간다면 눈총을 받을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세련된 포크질 나이프질로 요리조리 다리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행위조차 식도락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비둘기 몸통은 지방이 적고 살집이 제법 있어 씹는 맛이 있는데, 소스는 보통 무화과 등의 단 과일로부터 우려낸 것이라 단맛이 난다. 그렇기에 우리네 치킨 맛과 비슷하므로 비둘기라 해서 마다하지 말고 부디 시도해 보길 권한다.

    지역인들이 간혹 ‘레어’나 ‘미디엄’으로 비둘기를 주문한다면 그는 사냥동물 특유의 향에 사로잡힌 경우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아주 곰삭은 김치나 강력한 생마늘의 플레이버에 매료된 경우랑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사냥동물에 견주는 와인은 아무래도 영 와인보다는 올드 와인이라야 한다. 오래 묵은 와인에서 풍기는 쿰쿰한 부케와 곰삭은 맛을 고기 맛에 보태기 위함이다. 그러면 향기들이, 그리고 맛들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입맛을 제고하는 것이다.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

    포도밭을 사이에 두고 샤토와 마주보는 호텔 레 수르스 드 코달리 역시 샤토의 오너가 운영한다. 그 호텔(별 다섯 개)에는 식당이 둘 있고, 그중에 투숙객이 아침을 먹는 레스토랑이 2010년 3월에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하나를 받았다. 붉은 카펫이 깔린 은은한 실내의 멋이 눈을 비벼 뜨고 겨우 정신을 차린 아침에도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지만, 늦은 오후의 한가한 포도밭을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식사하기에는 ‘빨래터 탁자’란 뜻의 라 타블 뒤 라부아(La Table du Lavoir)가 좋다.

    ◇샤토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라 타블 뒤 라부아의 나무 외관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19세기에는 이곳이 빨래터라 포도 농군들의 아낙네들이 즐겨 모이던 곳이었다. 여기서의 최고 메뉴 역시 비둘기다. 이 요리 한 접시에다 이 집 하우스 와인인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 레드 한 잔을 곁들이면 남부 보르도의 풍성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잔이 금세 비게 되어 소믈리에를 부를밖에. 그에게 빈 잔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외치는 말, ‘앙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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