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일지▶/도량

명상 108 배에 들어 (3 )

눌재상주사랑 2009. 3. 22. 00:52

행복 불행 탐욕이 내 마음속에 있음을 알며 쉰번째 절을 올립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드는 것임을 알며 쉰 한번째 절을 올립니다.

평범한 것이 소중한 것임을 깨달으며 쉰두번째 절을 올립니다.

지나간 일에 소중한 것임을 깨달으며 쉰세번째 절을 올립니다.

소유하되 일체의 소유에서 벗어나기 위해 쉰네번째 절을 올립니다.

 

이 세상 만물이 어느것도 내 것인 것은 하나도 없으며 또한 내 마음 마져도 내 것이 아님을 알때 비로소 자기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방하착( 放下着 )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어느 큰 스님의 말씀이 뇌리에 스치는군요.

 

인내는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며 쉰다섯번째  절을 올립니다.

참회하는 마음이 으뜸이 됨을 알며 쉰여섯번째 절을 올립니다.

 

금강경에서 부쳐님이 수보리장자와 의론하시던 말씀을 새겨봅니다. 가리왕 할절 시대, 가리왕이 부쳐님의 몸뚱아리를 팔도 자르고 다리도 자르지만 끝까지 인욕하시던 모습과 가리왕을 처벌하기 원하는 주변 법왕들의 주청도 뿌리치고 참으신 일은 우리에게 눈물이 쏟아지도록

인욕을 강조하신 대목이 아닐까요. 하지만 다음 세계에서는 가리왕의 삼독을  뿌리채 뽑아버린다는 원을 세우는 눈 앞에서 다가오는 권력의 핍박 앞에도 노여워하지 않으시고 상대의 업연의 뿌리를 다음 세상에서는 더이상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는 더 큰 인욕이 우리에겐 더욱

소중한 말씀이 아닐까 새겨봅니다.

 

지혜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기 위해 쉰일곱번째 절을 올립니다.

마음을 쫓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며 쉰여덟번째 절을 올립니다.

자신을 닦는 데 게을리 하지 않으며 쉰아홉번째 절을 올립니다.

 

조선조 남명 조식이라는 유학자는 평생에 벼슬 살이를 하지 않으며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사신 분인데 이 분은 늘 지팡이 끝에 성성자(惺惺子)

라는 방울을 달고 다녔답니다. 잠시라도 마음의 경계를 늦추면 그 일순간에 마음이 자기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것같습니다.방울이 걸어갈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를 내면 마음을 순간 순간 스스로 살피고 추스리면서 평생 스스로를 관리한 것은

마음을 자신이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다 잡아야 마음의 주인이 된다는 무서운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시련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예순번째 절을 올립니다.

시간이 흘러도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예순 한번째 절을 올립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충만한 마음속에 기도를 위해 예순 두번째 절을 올립니다.

침묵 속에서 나를 발견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예순 세번째 절을 올립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 할 수 있는 고귀한 순수를 모시며 예순 네번째 절을 올립니다.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모시며 예순 다섯번째 절을 올립니다.

가난으로 굶주리고 힘겨운 생활을 하는 빈민을 모시며 예순 여섯번째 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해 땀 흘리는 농민을 위해 예순 일곱번째 절을 올립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남을 위해 나누는 마음을 모시며 예순 여덟번째 절을 올립니다.

내 몸을 빌려 귀한 생명으로 태어난 자식을 모시며 예순 아홉번째 절을 올립니다.

나와 더불어 사랑으로 하나 되는 배우자를 모시며 일흔번째 절을 올립니다.

 

대승에 사는 부처님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니련자하 강가에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길상초를 깔고서 수자티라는 처녀가 가져다 준 소 젖을

마시고는 일주일만에 중도에 현등각하시고는 이 큰 진리를 혼자만 아시고 가실 것인가 뭇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하실 것인가를 고민한 일은 이 진리는 쉽고도 어려운 실천이 동반하는 진리이기 때문이었지요. 이 법을 알림에 묘법 연화경을 통해서 부처님 만년에 설하신것이라 하더군요.

서로가 서로를 서로의 존재로서 신분도 인종도 혹은 인간이라는 우월감도 동물이나 미물 혹은 식물에게도 모두가 동등한 생명체로서의

존엄성이 있음을 설파하신 대승에 사는 일 2552년전에 부처님은 이미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으론 민주정치 환경론자의 눈으로보면 또한 선각을 하신것이지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선지자들이 인류에게 정신적 해방을 가져다 준 큰 혁명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장애우들을 모시며 일흔 한번째 절을 올립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길을 가는 친구를 모시며 일흔 두번째 절을 올립니다.

누릴 수 있으나 절제하는 자발적 가난을 모시며 일흔 세번째 절을 올립니다.

자신을 낮추어 낮은 곳으로 자리하는 겸손을 모시며 일흔 네번째 절을 올립니다.

항상 나보다는 남을 배려 할 수 있는 양보심을 모시며 일흔 다섯번째 절을 올립니다.

지구 자연이 병들어 감을 생각하며 일흔 여섯번째 절을 올립닌다.

사람의 생명과 지구 자연의 모든 생명은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일흔 일곱번째 절을 올립니다.

인간의 욕심에 파괴되어 고통받고 신음하는 자연에 대해 일흔 여덟번째 절을 올립니다.

병 들어가는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일흔 아홉번째 절을 올립니다.

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든번째 절을 올립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