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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36) 은둔 기사의 와인, 에르미타주

눌재 2011. 10. 5. 20:55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36) 은둔 기사의 와인, 에르미타주<세계일보>
입력 2011.07.07 (목)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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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계곡 최고의 포도 산지
확 트인 전망 시원한 바람
포도나무 잎도 뽀송뽀송
  • 프랑스 와인의 대표 산지 론 밸리는 론강 유역에 발달해 있다. 남으로 남으로 흘러 아비뇽을 지나 지중해에서 종결되는 론강은 관광의 길잡이이자 와인 생산지의 탯줄이 된다. 유명한 프로방스는 강 하류에 발달해 있다. 론강은 와인 명산지 에르미타주, 콩드리외, 코트 로티, 샤토뇌프 뒤파프 등을 품고 있다. 아비뇽과 샤토뇌프 뒤파프를 벗어나 북으로 강을 따라 오르면 명산지 에르미타주에 다다른다. 강이 굽이쳐 이리저리 굴곡이 생기는 가운데 남향으로 노출된 등성이는 명산지의 후보가 된다. 탱 레르미타주 마을의 뒷산에 이렇게 조성된 에르미타주는 북위 45도에 있는 북부 론 계곡 최고의 포도 산지이다. 

    샤푸티에 양조장이 소유한 에르미타주 한 구역에서 ‘르 파비용’이 잉태된다.
    에르미타주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로마 시대에 강성했던 도시 비엔의 주변에 있어 일찍이 ‘비엔 와인’으로 불렸다. 이어서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교회 이름을 따라 ‘성자 크리스토퍼 언덕 와인’으로도 불렸고, 인근에 번성한 도시 투르농의 영향으로 ‘투르농 와인’으로도 불렸다. 그러다가 17세기부터는 과거 십자군 전쟁 때의 한 기사가 전쟁에 신물이 나 이곳을 찾아 은둔했다는 에피소드가 널리 알려진 이후로 오늘날까지 ‘은둔’이란 뜻의 ‘에르미타주’로 불리고 있다.

    에르미타주(Hermitage)는 아주 남성적인 기상이 넘치는 와인이다. 탱 레르미타주 마을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려 보면 포도밭은 제법 넓게 포진되어 있는데, 강의 왼쪽 즉 좌안에 있으면서 산등성이에 위치한 남향과 그 언저리 포도밭은 특별히 잘 익는다. 거기서 나온 포도에 ‘에르미타주’라는 와인 딱지를 붙인다. 반면 그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예 강의 오른쪽 즉 우안에서 생산된 포도는 에르미타주가 아닌 그 비슷한 와인 즉 크로즈 에르미타주 와인이라 호칭한다.

    에르미타주는 왕년에 보르도만큼 저명했다. 보르도는 18∼19세기에 에르미타주의 포도를 혼합하여 강건하고 힘찬 와인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에르미타주는 색도 진하고, 맛도 강하고 진한 남성 취향의 와인이다. 보르도의 샤토 팔머는 ‘역사적인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혼합 와인을 출시하며 전통 복원에도 일조하고 있다. 한편 호주에서는 에르미타주를 벤치마킹해서 최고의 와인 그랑지 에르미타주를 만든다. 

    에르미타주 포도밭에 오르면 굽이치는 론강 유역의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에르미타주 와인의 진면목은 마을 뒷산 꼭대기에 오르면 저절로 느껴진다. 해발고도 약 300m에 서면 트인 전망에 눈이 시원해지고, 부는 바람에 온몸이 시원해진다. 포도나무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오로지 완숙됨만을 꿈꾸며, 비 온 후에도 시원한 바람을 맞는 잎들은 금방 뽀송뽀송해져서 상쾌하게 뻗어나간다.

    에르미타주의 대표적인 토양은 남서면에 자리 잡은 화강암이다. 여기서는 강력한 힘의 와인이 태어나므로 검은 포도를 심고, 정남부와 남동면은 황토로 구성되어 섬세하고 활기찬 맛의 청포도를 심는다. 언덕 중간 부분과 기슭은 충적토로 석회암과 진흙토양인데 여기서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향기로운 와인이 배출된다. 이렇듯 에르미타주의 면적 140ha는 토양 성분, 해발 고도, 경사도, 방향에 따라 여러 국부적인 미세 기후로 나뉘며, 생산자에 따라서는 그 미세 기후를 와인으로 일대일 치환하려는 일도 있고, 이것저것 다 혼합하여 복합미를 추구하는 자들도 있다. 즉 단일 포도밭의 에르미타주와 여러 밭 포도를 섞은 에르미타주의 두 가지 스타일이 존재한다.

    에르미타주는 레드와 화이트 둘 다 허용되어 있다. 같은 구역에 한쪽에서는 검은 포도 시라, 다른 쪽에서는 청포도 마르산과 루산을 키운다. 일부는 마르산느만을 키운다. 단일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에르미타주를 만들면 철자에서 ‘h’가 빠져 ‘Ermitage’가 된다. 한편 ‘Hermitage’는 여러 밭의 포도로 만든 혼합 와인을 의미한다.

    점심 시간에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점도 샤푸티에 양조장 근무의 매력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경사진 산등성이에 조성된 포도밭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황량하게 보인다. 4월엔 잎이 무성하지 않아 올려다 봐도 내려다 봐도 흙밖엔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낯선 것이 있다. 포도밭에 붙어 있는 큰 간판이다. 강 건너 멀리서 봐도 읽을 수 있는 이 간판들은 소유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타 지방에서는 별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렇게 점잖게 보이진 않는다. 과거 워낙 이 지역 와인들이 판로가 어려워, 큰 양조장이 판로 확보에 큰 역할을 했었다. 그중 몇 군데는 자기 브랜드로 와인 판매에 성공을 거두었고, 그 수익금으로 에르미타주 포도밭을 점차 사들였다. 그렇게 축적된 포도밭은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 몇 군데가 에르미타주를 과점하고 있으며, 저마다 자기 간판을 포도밭 언덕에 내걸고 있는 것이다.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


    ◆추천 호텔

    미셀 샤브란(www.chabran.com)

    에르미타주를 품고 있는 마을 탱 레르미타주는 조그마한 포도주 마을에 불과한 관계로 호텔 방 얻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마을 외곽을 살피는 게 낫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셀 샤브란 호텔은 주도로에 붙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건물이 단정하고 실내가 깨끗하다. 레스토랑과 객실도 뛰어나며 거기다가 가격까지 합리적이다. 야외 잔디밭에서도 보기 좋고 맛 좋은 식사가 가능해 주변에서 인기가 높다. 도로 사정이 좋아 10분 내에 에르미타주 간판을 목도할 수 있다.

    ◆추천 양조장

    샤푸티에(www.chapoutier.com)

    에르미타주의 강자 샤푸티에 양조장에 가 볼 필요가 있다. 샤푸티에는 우선 에르미타주 밭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다. 140ha의 에르미타주 포도밭 중에서 32.5ha를 차지하여 다복한 양조장이며, 오늘날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유기농 혹은 비오디나미 농법에 대해 일찌감치 눈을 떠 자연 친화적인 와인을 만들고 있는 200년 역사의 가족 경영 양조장이다.

    샤푸티에의 에르미타주 와인은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에르미타주 동편 언덕, 즉 척박하고 황량한 화강암 토양인 ‘레 브레사’ 구획에서는 Ermitage ‘르 파비용’을 만들고, 주변 다른 두 구획의 시라를 혼합하여 Hermitage ‘모니에르 드 라 시즈란’을 양조한다. 전자는 에르미타주의 전형을 이룬다. 빛깔도 진하고 풍부한 복합미에다 힘, 세련미까지 두루 갖추어 최고의 품질로 꼽힌다. 후자는 투명한 색에다 체리 맛이 나는 싱그러운 맛, 은은한 감촉, 아주 우아한 질감 등이 돋보인다. 2008은 수확기 전에 비가 내려 품질이 부족할 것으로 여겼지만, 비오디나미 농법으로 튼실해진 샤푸티에 토양은 가뭄에도 온화한 정기를 끝내 지켜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샤푸티에의 하이라이트는 직원 식당이다. 정이 넘치는 식당이다. 질박한 나무 탁자에 도란도란 둘러 앉아 양조장에서 나오는 수십 가지 와인 중에 그날에 개봉할 와인을 나눈다. 소박하지만 여간 정겨운 게 아니다. 다른 양조장 직원들은 보통 집에 가서 먹거나 사먹겠지만 여기는 다르다. 양조장 바로 뒤가 기차역이니 렌터카 없이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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