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와 여행▶/와인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40〉 ‘보물찾기, 소나무 와인을 찾아라’

눌재 2011. 10. 5. 20:59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40〉 ‘보물찾기, 소나무 와인을 찾아라’<세계일보>
  • 입력 2011.09.09 (금) 01:42, 수정 2011.09.09 (금) 01:44
매년 수천 병 불과… 내놓자마자 한 시간이면 매진
  • 포므롤(Pomerol)은 보르도의 작은 마을이다. 포므롤은 ‘씨 있는 과일’이란 뜻의 라틴어 포뭄(pomum)에서 비롯되었으니, 태생적으로 포도나무와 연관이 있다. 사과(pomme)도 이 말에서 유래되었다. 관광은 고풍스러운 생테밀리옹에서 하고, 여기서는 좀 다른 걸 해보자. 시간도 많으니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여유롭게 포도밭을 거닐거나, 카페에 앉아 일기를 써보거나, 아니면 선글라스 뒤로 졸린 눈을 가리고 명상에 잠기거나. 열혈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번쯤 해봄 직한 포므롤 보물찾기, 자 이제부터 손바닥만 한 포므롤에 여행자들을 풀어 놓고 보물찾기를 한다. 목표는 샤토르팽을 찾는 일이다. 포므롤에 가는 것 자체가 와인 여행자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메를로의 맛이 세계에서 가장 좋기 때문이다. 페트뤼스는 찾기 쉽다. 그 간판도 보이고 베드로 동상도 길가에서 쉽게 눈에 뜨인다. 하지만 르팽은 찾기 어렵다, 어린 시절 보물찾기처럼. 독자 여러분도 보르도에 여행간다면 도전해 보시길 바란다.

    포므롤로 이르는 길의 이정표.
    르팽은 페트뤼스처럼 포므롤 가운데에 조성되어 있는 야트막한 고원에 포도밭을 두고 있지만, 주변이 좁다란 농로로 들어차 있어 찾기가 어렵다. 더구나 주위 양조장의 멋드러진 건축물에 비해 초라한 농가 모습을 띠고 있어 더욱 그렇다. 포도밭 속에서 길을 잃는다면 믿을 건가. 주위를 둘러보면 비외샤토세르탕, 레반질, 페트뤼스가 다 보이는데도 르팽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벨기에 플레미시 지역 출신인 티엔퐁 가문은 유서 깊은 와인중개상 집안이다. 1840년부터 보르도 와인을 사고팔아 왔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대서양을 장악하며 유럽의 경제를 석권한 이후 특히 생테밀리옹과 포므롤에는 벨기에 출신들이 뿌리를 많이 내렸다. 특히 1860년 북유럽으로 뚫린 기찻길은 뱃길이 없었던 리부른 와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판로를 제공했다. 12세기부터 보르도를 다스린 영국이 뱃길이 편리한 메독에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플레미시는 기차길이 발달한 리부른, 즉 포므롤과 생테밀리옹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르팽은 1979년 빈티지부터 소량 생산되는 와인이다. 농가에서 만드는 극히 자연스러운 맛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농가에서 만드니 여행자는 찾기가 힘들다. 힌트는 양조장 이름인 르팽, 영어로 하자면 더 파인, 즉 소나무이다. 소나무를 찾으면 된다. 포도밭 옆 소나무 그리고 허름한 농가, 그것이 보물찾기의 힌트이다. 

    소나무만 제외하고 농가는 새 건물로 변모하고, 현대식 양조셀러가 들어서고 있다.
    왜 사람들이 르팽, 르팽 할까. 나는 이 와인을 출시 직후부터 지금까지 앙프리뫼르(선물거래)로 사들인다는 독일인 아민 디엘에게 물었다. 그는 나헤 지방에서 조상 대대로 화이트를 담금질하는 수준 높은 와인 양조가이다. 

    2010년산 배럴와인 시음 후엔 갓 병입한 2008년산이 맛보기로 나왔다.
    “그건 말이죠. 르팽은 아주 자연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고 무척 향기가 좋기 때문이죠. 여린 듯해도 숙성력이 아주 좋지요.”

    르팽을 매년 산다는 아민 디엘에게 그 가격을 물었더니, “그건 말 못해요. 하지만 와인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는 훨씬 싼 값이죠. 매년 사기 때문에 양조장에서 합리적인 값으로 내놓거든요.”

    르팽은 1981년에 등장했지만, 정작 스타덤이 오른 건 이듬해 1982년 빈티지이다. 1982년의 맛이 탁월해 수집가의 사냥감이 된 뒤로 유통시장에서는 출시가격의 두세 배로 거래된다. 우리 백화점 표시가격은 보통 300만∼400만원이다.

    매년 고작 수천 병 양조되는 르팽이 완판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르팽의 주인장 자크티엔퐁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1시간.” 매년 고정 고객들이 출시되자 마자 늘 샀던 대로 사기 때문에 1시간이면 충분히 다 팔리는 것이다. 아참, 자크는 제이콥의 불어식 표현이고, 이는 곧 야고보이다.

    르팽의 진귀한 측면은 또 있다. 양조장에 가면 항상 방문객들이 많다. 그들 사이 좁은 공간에 서 있으면 내게도 잔이 오고 그 잔이 조금 채워진다. 와인 설명서를 방문객마다 한 부씩 주면서 자크티엔퐁은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질문에 경청한다. 어떤 게 진귀한 것이냐 하면 나를 포함한 방문객들이 와인 맛을 보면서 특유의 뱉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래시계 모양이나 각종 형태의 통에다가 와인전문가들은 퉤퉤 잘도 뱉는다. 삼키면 취하기 때문이다. 

    포도밭 사이로 보이는 소나무와 평범한 농가. 이곳에서 르팽을 만든다.
    그러나 르팽에서는 보통 방문객과 주인장이 잔을 손가락에 개성에 맞게 걸치고 홀짝거린다. 4월에 방문한다면 최근 병입한 와인과 직전연도 와인, 이 두 가지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르팽은 뱉지 않는 거의 유일한 보르도 와인이다. 자연스럽게 와인의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간다. 단골 주제인 ‘무엇이 좋은 와인인가’라든가 ‘어떤 와인을 만들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엔 자크티엔퐁은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좋은 와인이란, 음, 지금 마셔도 좋고, 나중에 마셔도 좋고.”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

    ◆추천 식당
    La Table des Vignerons (포도농군의 식탁) 
    www.latabledesvignerons.fr

    포므롤에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없다. 인근 생테밀리옹에 없는 게 없기 때문에 굳이 작은 마을 포므롤에 뭔가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같은 작은 상점들이 몇 개 있을 뿐이었으나, 최근에 한 곳이 문을 열었다. 그래서 따끈따근한 새로운 식당을 추천한다. 이 집은 17유로 세트메뉴나 28유로 ‘포도원 농부’ 메뉴를 점심에 주문하면 좋다. 바쁘다면 한 접시 10유로 전후의 단품 메뉴도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