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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41)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샤토 피숑 바롱과 샤토 피숑 라랑드’

눌재 2011. 10. 5. 21:01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41)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샤토 피숑 바롱과 샤토 피숑 라랑드’<세계일보>
  • 입력 2011.09.22 (목) 21:52
포이야크는 메도크의 와인 1번지
열성적인 애호가들의 최종 기착지
부드러운 새끼양고기 요리로 유명
  •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양조장 가운데 피숑 라랑드와 피숑 바롱은 해와 달처럼 빛난다. 포이야크 입구에서 두 샤토는 방문 차량에 너그러운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인다. 웅장하고 장엄한 두 샤토의 건축양식은 보르도 하늘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해와 달인 것이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다 만족스럽다.

    들뜬 마음 한 가득 실은 자동차가 마고에 이어 생줄리앙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포이야크 마을로 접어든다. 드디어 포이야크다. 포이야크는 중세에는 런던으로 배송할 와인의 집합소였고, 수십 년 전까지는 거대 물류창고가 있어 상거래가 활발하던 곳이었다. 부드럽기로 소문난 새끼 양고기의 도축장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열성적인 와인 애호가들의 최종 기착지가 된다. 최상위 1%에 해당하는 특1등급 양조장 다섯 가운데 무려 셋이 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메도크의 와인 1번지는 포이야크다. 쟁쟁한 샤토들이 포진한 포이야크에서 이 두 샤토는 여행자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남성적인 샤토 피숑 바롱.
    포이야크에 들어서자마자 여행자는 놀란다. “아, 이래서 샤토라고 하는구나.”, “샤토가 이런 거구나.” 도로 왼쪽으로 그림 같은 성이 보인다. 피오나 공주가 갇혔을 것 같은 뾰족한 첨탑이 여러 개 달린 성이 보인다. 그 길 건너엔 그만한 성이 또 있다. 왼쪽은 아들의 성이요, 오른쪽은 딸의 성이다. 둘은 오누이 성인 것이다.

    샤토 피숑 바롱(www.pichonlongueville.com)과 샤토 피숑 라랑드(www.pichon-lalande.com)는 1850년 전까지만 해도 한 덩어리였다. 아버지가 상속하면서 둘은 쪼개지고, 아들은 원래 살던 성 건너편에 새로운 성 샤토 피숑 바롱을 지었다. 이 샤토는 바롱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의 성이다. 바롱은 ‘남작’이란 뜻. 샤토 피숑 바롱은 보르도에서 가장 세련된 건축물이다. 성 앞의 연못과 그 주변의 자갈길, 한쪽으로 비껴 선 양조장,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정갈하고 세련될 수가 없다. 입구에 차를 정차하고 배경에 샤토가 통째로 들어오게 한 다음 만면의 미소를 보이며 셀카를 찍으면, 영락없이 “이 샤토, 바로 내 샤토야” 하는 과대망상에 빠지기 쉽다.

    뾰족한 첨탑 아래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낸다면 어떤 기분일까. 죄수나 괴물은 좁다란 틈에 갇히겠지만, 손님은 바로 옆 광장 같은 방으로 안내된다. 동행한 여기자는 일주일의 보르도 여행 중에서 그 밤을 최고로 쳤다. 샤토 피숑 바롱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성을 떠날 때에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저런 성에서 묵었다니.” 성의 모습이 점점 멀어질수록, 화려했던 침실의 기억은 점점 또렷해진다.

    예쁘게 꾸민 정원보다도 더 예쁘고 우아한 여성적인 샤토 피숑 라랑드.
    샤토 피숑 라랑드는 샤토 피숑 바롱의 길 건너편에 자리한다. 샤토 피숑 라랑드에서는 지롱드 강이 코앞이다. 강바람을 맞으며 포도밭에 고인 빗물이 훨훨 날아간다. 뚝심 있고 응축된 맛으로 유명한 최상위 1급 샤토 라투르 바로 옆에 있지만, 피숑 라랑드는 상당히 여성적인 역사를 지녔다. 애초에 딸에게 상속된 영지에다가 최근까지도 오너가 여성이었으며 2007년부터는 샴페인 회사가 주인이 된 것이다. 루이 뢰더러 샴페인 회사는 또한 이 샤토의 대표로 여성을 지명해 화제가 되었다. 그녀 이름은 실비 카즈, 바로 샤토 린치 바주의 주인장 장 미셸 카즈의 여동생이다.

    피숑 라랑드은 유리 공예품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이전의 오너였던 여성의 취미 활동이 결실을 본 것인데, 그녀는 규소에서 유리로, 포도에서 와인으로 변화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하면서 인간의 노력을 중시하였다. 여성의 섬세한 손길은 피숑 라랑드를 아주 자연친화적인 포도밭으로 변화시켰는데, 보르도에서는 드물게 ‘비오디나미’(Biodynamie 우주와 자연의 주기에 따르는 생체역학 원리에 가까운 유기농법)를 채택하고 있다.

    피숑 라랑드를 여성의 와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역사에만 있지 않고 와인 맛에도 있다. 포이야크에서는 보통 강건하고 심지 있는 와인을 표방하는 터라 보통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많이 재배하지만, 여기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 이웃 샤토 라투르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비율이 80∼90%이지만, 피숑 라랑드는 50% 남짓이다. 나머지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이 차지한다. 그래서 피숑 라랑드의 스타일은 무척 우아하다.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이 들며 벨벳처럼 섬세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성의 와인 샤토 피숑 바롱은 묵직하고 단단한 맛이다. 이 두 샤토가 분할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어떤 맛을 줄지 자못 궁금하다. 

    샤토 피숑 바롱의 와인메이커 마티뇽(Matignon)과 홍보책임자 실러(Schyler, 오른쪽).
    피숑 바롱과 피숑 라랑드는 둘 다 메도크의 2등급 와인이다. 2등급이라고 하니, 내신 2등급이 떠오르겠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최상위 2%를 의미한다. 오늘날 보르도 샤토는 그 규모나 부가가치로 봐서 가족이 경영하기에 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닌 까닭에 많은 샤토가 대기업이나 대자본가의 통제를 받는 게 현실이다. 두 샤토 역시 마찬가지다. 샴페인 대기업이 이끄는 피숑 라랑드처럼, 피숑 바롱은 프랑스 보험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업활동을 하는 보험회사 악사는 ‘악사 밀레짐’이란 이름의 샤토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 회사는 샤토 피숑 바롱를 비롯한 여러 샤토를 소유하는데, 프랑스뿐 아니라 포르투갈과 헝가리까지 외연한다. 이런 연유로 샤토 피숑 바롱에서 머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패키지에 포함된 디너에서는 악사 밀레짐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와인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르도 샤토 디너의 유일한 단점은 생산하는 와인 종류가 고작 한 둘, 많아야 셋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피숑 바롱에서는 포이야크뿐 아니라 포므롤과 스위트 와인 등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니 다채로운 식탁이 꾸며진다.

    이런 이유로 옥스퍼드 출신의 악사 밀레짐 사장은 와인업계에서 행운아로 통한다. 한편 샤토 피숑 라랑드의 손님들은 19세기 스타일의 다채로운 색감으로 장식된 샤토 베르나토트로 초대된다. 하지만 일반인을 위해 방을 제공하진 않는다.

    저마다 개성을 자랑하는 메도크의 샤토 가운데 샤토 피숑 라랑드와 샤토 피숑 바롱은 와인의 수준이나 건축물의 수준이 대단하다. 최상위 1%에는 끼지 못하지만, 두 와인은 등급을 뛰어넘는 품질을 보이기 때문에 2등급이 아니라, ‘슈퍼 세컨드’라는 별칭을 지닌다. 포이야크의 입구에 있는 이 두 샤토는 해와 달처럼 보르도에서 반짝이는 곳이다.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

    포이야크과 생줄리앙 이정표.
    ◆추천

    포이야크의 향토 음식, 새끼 양고기 요리

    샤토 관계자로부터 점심 대접을 받는다면 당황할 필요가 없다. 아주 맛있는 새끼 양고기를 주메뉴로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먼 이국 땅에서 1000유로 이상의 항공료를 호기롭게 써버린 한국의 열혈 와인 소비자 한 사람을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열어줄 메도크인은 어딘가에 최소한 한 명은 있으니 너무 놀라지도 마시라. 식당의 간판은 ‘르생줄리앙’(www.le-saint-julien.fr). 아니 포이야크 마을에서 포이야크식을 먹자면서 기껏 온 데가 생줄리앙이라니, 허 약간 웃긴다.

    포이야크와 생줄리앙은 이웃 마을이다. 포이야크는 포이야크이고 생줄리앙은 생줄리앙이다. 둘 다 이름난 와인이자 마을 이름이다. 식당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정갈하게 보였고, 소믈리에와 웨이터도 자연스런 몸짓과 미소를 지녀 편안했다. 소믈리에는 한때 메도크 최고의 레스토랑 ‘코르디앙 바주’에서 근무한 사실을 뿌듯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푸아그라가 전채로 나왔다. 메뉴는 이미 준비된 것 같았다. 샤토의 녹을 먹는 사람이 예약을 했으니 와인은 그 샤토 브랜드가 나올 것이다. 현대자동차 직원이 업무차 지방 출장을 가는데 삼성자동차를 타고 가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메인 코스에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포이야크 새끼 양고기. 잘게 썰어 볶은 살들이 무척 부드러워 입에서 녹았다. 함께 곁들인 포이야크 와인은 풍성한 맛과 향이 좋았다.